* 사망소재, 짧은 글 *

 

 

 

기다리는 오늘

 

 

  하이바 리에프는 불안했다. 지금 막 쿠로오의 집에 들어선 그의 앞에, 이맘때쯤의 익숙한 광경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쿠로오 테츠로는 청소를 하고 있었다. 무거운 커튼보다 더 두텁게 가라앉은 먼지들이 털렸다. 곧 창문이 열렸다. 다행이 불어온 바람은 묵은 먼지를 반쯤은 휩쓸어 가주었다. 다음은 간이 식탁이었다. 쿠로오의 손은 망설임 없이 쓰레기를 분류했다. 중간 중간 흩어진 물건들의 제자리를 찾아주는 여유를 보이기도 했다. 그의 움직임이 빨라질수록 리에프의 불안함은 숨길 수 없는 초조함으로 바뀌었다. 이는 하얀 살점의 거스러미가 지저분하게 불어 오른 리에프의 손가락들이 증명해줬다.


  리에프는 자신의 짐을 현관 께에 두었다. 쿠로오는 여전히 그의 등장을 알지 못한 듯 이제는 리에프의 흔적을 지우기에 바빴다. 멀쩡한 물건들이 쓰레기통에 담겼다. 어제 읽은 책, 그제 사다 둔 탁상시계, 저번 주에 함께 고른 옷. 순서를 정해야했다. 이름, 손, 그것도 아니면 청소. 역시 불러 세우는 것이 먼저였다. 그러나 계획과는 달리 쿠로오를 찾는 급한 손이 동시에 나갔다.


“쿠로상, 오늘 뭐 즐거운 일, 있나 봐요?”

 

  리에프의 목소리는 꽤 밝았다. 되도록 아무렇지 않게 불러야했다. 이는 반복된 경험에서 비롯된 버릇이자 자기방어였다. 매 순간 리에프는 기대를 했다. 오늘은 쿠로오의 대답이 다를지도 몰랐다. 자신의 방문을 위한 준비였다는 대답은 사치스러웠다. 모든 집안일을 리에프의 몫으로 돌리는 것이 미안했노라고, 그래서 오늘만큼은 자신이 나섰다는 말이면 충분했다. 이제 괜찮아. 지난 삼년간 리에프가 쿠로오에게 요구했던 반응은 단순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리에프는 쿠로오에게 다시 기대를 했다.

 

“오늘 보쿠토 돌아오는 날이잖아.”

 

  그러나 대답은 깔끔한 거절이었다


  쿠로오의 망상은 연례행사 같은 것이었다. 평소에는 아무렇지 않았던 이가 ‘그 날’이면 보쿠토를 찾았다. 과거의 연인에 대한 예의인지 미안함인지, 혹은 그가 정말 보쿠토의 귀가를 기다리는 건지 아니면 부러 하는 행동인지 이제는 구분조차 어려웠다. 차라리 쿠로오의 행동이 병적이길 바라기도 했다. 그러나 현실을 재우고 꿈을 일깨우는 순간의 단절은 무섭도록 정확했다. 그렇기에 리에프는 말해주어야 했다. 쿠로오의 망상에 어울려주기엔 여름 어디쯤의 수요일은 이미 세 번이나 반복되었기 때문이다.

 

“보쿠토상, 안 와요.”
“뭐? 무슨 말이야?”
“보쿠토상, 이제 안 와요. 쿠로상.”

 

  쿠로오는 고개를 갸웃거렸고 리에프는 숙였다. 잠시간의 침묵이 지나면, 자신의 기억을 헤집는 것을 마친 쿠로오는 스스로 수긍하리라.

 

“아...”

 

  그의 깨달음은 항상 짧은 감탄사로 시작했다.

 

“맞아.”

 

  단 번에, 바닥으로 시선이 떨어졌다.

 

“그랬었지.”

 

  이제 부정의 단계는 생략됐다. 근 이년간 리에프가 얻을 수 있었던 유일한 성과였다. 그렇게 생각했다. 리에프는 쿠로오의 반응이 더 서러운 표정의 자신을 위한 배려라는 것을 여전히 알지 못했다. 매번 새롭게 보쿠토의 죽음을 인정해야 하는 쿠로오는,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그를 찾고, 그의 죽음을 깨닫고, 절망하고, 다시 그를 찾아 나섰다. 아직 수습되지 않은 보쿠토의 죽음은 쿠로오를 몇 번이고 원점에 주저 앉혔다.

 

“내가 대신하면 안돼요?”

 

  오늘도 리에프는 무릎을 꿇었다. 쿠로오를 붙잡고 눈물을 흘렸다. 그의 손에 입을 맞추고 애원했다. 결국 반복이었다. 내가 잘할게요. 내가 노력할게요. 다짐과 같은 혼잣말이 이어졌다. 쿠로오는 언젠가 자신이 전 연인에 대한 망상으로 말라죽을 것을 알고 있었다. 죽음에 대한 책임이 그에게 있던 것도 아니었다. 애절한 마지막도 없었다. 그만큼 보쿠토의 죽음은 깨끗한 것이었다. 그러나 쿠로오에게 ‘알고 있는 것’과 ‘깨닫는 것’은 달랐다. 보쿠토 코타로를 기억하고 추모하는 것이 누군가의 몫이라면, 그의 부재를 매순간 실감해야 하는 것은 온전히 자신의 몫으로 두었기 때문이다. 이 상황에서 리에프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고작, 동정심으로 그 시기를 늦추는 것일 뿐이었다. 알잖아.

 

“나는 널 누구 대신이라고 생각해 본적 없어.”

 

  부드럽고 단호한 목소리였다. 쿠로오의 입술이 리에프의 손을 덮었다. 그의 양 엄지는 물에 불린 듯, 새하얗게 너덜거리는 지저분한 거스러미들로 가득했다. 원체 흰 피부의 리에프이기에 상처는 더욱 아파보였다. 새살이 돋아날 시간도 채 주지 못한 자신의 잘못이었다. 동시에, 온전히 자신을 위한 삶을 사는 리에프에게 긍정의 답을 주지 않는 스스로에게 경멸을 느꼈다. 여러모로 최악이었다.

 

“리에프는 리에프지.”

 

  지금의 최선이었다.

 

“그래서 보쿠토도 보쿠토인거야.”
 

  언제나의 대답이었다.

 

  커지는 울음소리 속에서 쿠로오는 생각했다. 내일이면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자신은 출근을 할 것이고 리에프는 연습을 나갈 것이다. 그 사이 몇 번의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실없는 이야기를 나눌지도 모른다. 엇비슷한 시간에 귀가를 해 함께 장을 보거나 외식을 하고, 웃고 떠들다 누구보다 깊게 서로를 끌어안고 잠이 들 것이다. 그러나 내일을 기다리기에 두 사람에게 오늘의 여름은 너무 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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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지긴] 시작의 끝

연성 2017. 1. 11. 19:08 |

* 약한 신체훼손, 사망소재, 짧은 글 주의해 주세요 *


 

 

시작의 끝

 


1.
  히지카타 토시로가 죽었다.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물기 찬 여름이었다. 그의 죽음과는 퍽 어울리지 않는 계절이었다. 태양은 뜨거웠다. 매미는 시끄러웠다. 바닥에서 올라오는 열기가 온몸을 사납게 찔러댔다. 모두가 울길 바랐지만 누구도 울지 않았다. 첫 번째 장례식은 진선조의 것이었다. 부장이라는 그의 이름에 걸맞은 꽤나 성대한 식이었다. 이틀 밤낮으로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차분한 애도의 행렬을 이어갔다. 두 번째 장례식은 사카타 긴토키의 몫이었다. 삼일 째 밤, 진선조는 온전히 그를 위한 자리를 내주었다. 두 사람이 사귀기 시작할 때와 마찬가지로 암묵적인 동의하에서였다. 어둔 방은 그만큼의 짙은 향내와 죽은 것의 냄새로 가득했다. 긴토키는 첫날과 마찬가지로 히지카타의 곁에 앉아있을 뿐이었다. 정확하게는 히지카타의 검, 그의 사복 꾸러미와 함께였다. 그것들을 가지런히 일렬로 늘어놓은 모습은 흡사 의식과도 같았다. 딱히 괴로워하거나 슬퍼보이지도 않았다. 혹자는 그가 히지카타의 죽음에 분개해 검을 들 것이라 장담했고, 더러는 처절한 오열을 예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모든 믿음을 배신하듯, 긴토키는 누구보다 단정하고 조용했다. 그리고 그것이 사람들이 기억하는 ‘사카타 긴토키’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2.
  사내에 대한 소문은 몇 년에 걸쳐 부풀었고, 누락되거나 잠시간 사라지기도 했다. 그러나 갑작스레 등장해 낭인들의 본거지를 몰살한다는 누추한 사내의 이야기는 어떠한 방식으로든 근근이 회자됐다. 우연히 사내를 목격한 치들은 오래전 양이지사들의 활약을 더듬어 그를 ‘백야차’라 불렀다. 물론, 그들이 기억하는 백야차와의 공통점은 오로지 백발뿐이었다. 이마저도 소문을 거듭할수록, 산발에 뒤엉킨 머리칼은 회색빛에 가까워졌다. 걸치고 있는 옷은 여러 번 덧대 그 원형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온몸을 휘감은 붕대는 사내의 정체를 더욱 모호하게 했지만, 확실한 것은 얼굴의 반쪽이 화상으로 일그러져있다는 사실이었다. 그의 검은 부러 살아온 흔적을 지우지 않은 채였는데, 그 때문인지 칼날은 불투명한 검은색을 띄었고, 왼손에는 단단하게 동여맨 짐 보따리가 들려있었다. 그래서? 다음은? 호기심이 동한 누군가의 독촉하는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이는 거의 없었다.

 

3.
  단칼이었다. 어떠한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옮기는 발걸음은 쌓인 눈이 덮었고, 내지르는 비명은 또 다른 비명이 덮었다. 마지막으로 찾아낸 낭인들의 소탕은 반나절이면 충분했다. 이 반나절을 위해 걸은 날들이었다. 이 반나절을 위해 버린 목숨이었다. 눈과 흙먼지에 뒤엉킨 사체들을 까마귀 떼가 덮었다. 흰 것과 붉은 것 사이에 검은 점이 박힌 기괴한 모습이었다.
  한 가운데 긴토키가 섰다. 자랑스레 펼쳐둔 절경을 감상할 수 있는 상석은 히지카타에게 내준 채였다. 홀연히 흔들리는 백골은 묵묵부답이었다. 그저 까닥거리며 무릎 꿇은 긴토키를 지켜볼 뿐이었다. 잠시 간의 고요. 그것은 서로를 위한 추모와도 같았다. 히지카타의 일부이면서 히지카타가 아닌 그것을, 긴토키는 조심스레 안아들었다. 히지카타, 입이 열렸다. 히지카타, 재차 호명하는 목소리엔 먹먹한 애정이 담겨 있었다. 우리가 그렇게 바라던 끝이다. 그 이상의 말은 무의미했다. 함께 생을 이어가자는 말도, 죽음으로 무언가를 이루자는 다짐도, 그들에게는 불필요한 사족이었다. 서로의 마지막을 조용히 품는 것만으로도 과분한 결말이었다.

 

  사카타 긴토키가 죽었다.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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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설픈 시간

 

1.
  얇은 티셔츠 한 장은 제가 봐도 무리수였다. 해가 질수록 더 그랬다. 여전히 이 시기의 날씨는 어려웠다. 계단을 오르던 하이바 리에프는 부는 바람에 다시 한 번 몸을 떨었다. 선배들은 굳이 이 음침한 계단을 이용하는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게 학교 구조상, 건물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동아리방부터 매점, 강의실까지, 추위에도 안전하게 이곳저곳을 오갈 수 있었다. 지금도 그랬다. 매점을 가야하는 거면 이곳을 거쳐 갈 이유가 없었다. 예전에는 지나가면서 담배라도 태웠었지, 그것도 새 휴게실이 생기면서 쓸모를 잃었다. 이제는 처분 대상인 의자나 책상 따위나 쌓아두는 빈 공터였다. 그럼에도 리에프가 이 길을 고집하는 건 오기가 반, 포기할 수 없는 휴식이 반이었다.  

 좁은 학교였다. 동선이 짧을 수밖에 없었다. 강의실만 나서도 선배들이 끓었다. 그 건물에 있던 간이식당과 매점은 이용하지 못하게 된지 오래였다. 거기다 리에프는 인사 앞뒤에 학번과 존칭까지 따박따박 붙여야 하는 체대생이었다. 그나마 남자선배는 인사나 잘하고 지나가면 됐다. 문제는 여자선배들이었다. 서로가 훤칠한 외모의 리에프를 붙잡아두지 못해 안달이었다. 그리고 그걸 다시 남자선배들에게 보이는 날엔 훈련은 고사하고 이유모를 비아냥을 얻어먹어야 했다. 대학이란 곳은, 고작 한두 살이 ‘선배’라는 호칭 하나에 교수님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하는 곳이었다. 가뜩이나 눈치 없는 체대생에겐 숨 돌릴 틈이 필요했다.

  그러나 마지막 계단에 발을 디뎠을 때, 리에프는 자신이 실수했음을 알았다. 가장 먼저 무릎께까지 오는 책 더미가, 체육복이, 그리고 꽤 큰 등치의 남자가 보였다. 하마터면 끌어안고 있던 빵 봉투를 놓칠 뻔 했다. 헉, 하고 소리 냈다. 동시에 입 밖으로 그런 소리를 낸 자신에게 재차 놀랬다. 담배를 피우던 남자 또한 인기척을 느꼈는지 돌아섰다. 분명 작년 신입생 환영회 때 본 선배였다. 꽤 고학번이었을 거다. 웃으며 던지는 농이 하나같이 촌철살인이라 뚜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 이후로는 처음이었다. 리에프는 아직 착지하지 않은 왼발을 그대로 직행해야할지, 아니면 물러서야할지 고민했다. 그러나 남자의 부름이 빨랐다. 올라와. 괜찮아.

  분명 울상일거다. 자신의 표정은 뻔했다. 안 그래도 굽은 등이 더 숙여졌다. 큰 키에 걸맞지 않은 보폭으로 다가갔다. 한 걸음씩 옮길 때마다 잊은 인사며, 어설픈 자세며, 반응이며, 실수한 것들이 떠올랐다. 조심스레 앞에 섰다. 남자는 이내 새 담배를 꺼내들 뿐 별 말이 없었다. 일단 선배에게 자신의 잘못을 고하고, 사죄의 말씀을 올리며, 처분을 기다리는 게 도리이자 순서였다. 

“쿠로오 테츠로”
“에?”
“내 이름. 넌 하이바 리에프. 맞지?”

  또 한 번 멋없는 삑사리를 냈다. 하도 방방 뛰어 대서 기억하고 있었어. 그날 너 술 마시고 토한 거 뒤처리 한 게 나다. 즐겁다는 듯 웃는 선배는, 쿠로오 테츠로는 리에프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아직 제 몸을 다루는 법을 모두 익히지 못한 리에프는 작은 움직임에도 크게 휘청거렸다. 그래도 금방 제자리를 찾아 섰다. 눈치가 없으면 반응이라도 빨라야 했다. 가,가,감사함다. 뒤늦은 인사 뒤에 잠시 마가 떴다. 실눈 사이로 쿠로오가 번졌다, 다시 뚜렷해지기를 반복했다.

“너 나 되게 불편하지?”
“네.”

  이번에는 쓸데없이 빨랐다. 아까보다 목소리도 더 큰 것 같았다. 대답에 후회하는 만큼 얼굴도 그의 말을 고스란히 옮겨냈다. 그리고 그가 혼나는 주된 이유 중 하나가 사실은 표정 때문이라는 것을, 리에프는 아직 몰랐다. 실수야 어찌됐든, 고개를 숙인 리에프는 합당한 범위내의 결과가 떨어지길 바랐다.

“나도 이해해. 여기 나도 신입생 때는 자주 이용했거든.”

  의외의 말과 함께 쿠로오의 손이 리에프의 정수리에 닿았다. 리에프의 키가 180이 넘은 이후, 머리를 쓰다듬는 것으로 애정을 표시하려던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막내인 그에게는 말 못할 아쉬움이기도 했다. 부드럽게 흐트러트리는 손길 사이로 담배냄새가 코를 찔렀다. 선배들이 많이 괴롭히지? 웃음기 섞인 되물음은 리에프를 거의 울릴 뻔 했다. 긴장이 풀렸다. 그제야 봉지를 쥐고 있던 오른손이 느슨해졌다. 서서히, 떨어진 해의 추위도 느껴졌다. 

 “난 이제 내 학번이 부담스러워. 밖에서 보면 애들이 너무 고참 취급하거든.”

  슬며시 눈을 뜬 정면에, 쿠로오가 있었다. 난간에 기대선 그는 생각보다 리에프 가까이에 서 있었다. 본인이 말하고도 멋쩍었는지 짧은 시간에도 여러 표정이 지나갔다. 그리고 이내 자신의 물건들로 눈길을 돌렸다. 리에프 역시 반쯤은 자동적으로 그의 시선을 따랐다. 쿠로오는 허리를 굽혀 비닐이 벗겨져 색 바랜 표지를 매만졌다. 이따금씩 들춰보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책에서 올라온 거스러미들이 나풀거렸다. 사물함, 이제 슬슬 비워줘야 해서. 묻지 않은 말을 혼자서 푸는 쿠로오에게, 리에프 또한 성실히 수긍해주었다.

한 대 줄까?”

  불쑥, 들이밀어진 손에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라이터는 알아서 쓰라는 듯 난간에 올려져있었다. 자신은 입에 댈 일이 없었던 물건이었다. 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적도 없었다. 선배의 호의에 쥐게 된 물건에 리에프는 난감해했다. 왼손에 들린 담배를 한번, 이를 능숙하게 무는 쿠로오를 한번, 마지막으로 난간에 놓인 라이터에 시선이 이르렀다. 선배들이 썼던 일회용과는 다른, 반질반질하게 윤이 흐르는 투박한 외관의 지포 라이터였다. 앞뒤로 뭔가가 새겨져 있었지만 잘 보이진 않았다.

“지금이 딱 좋지. 네 시 반쯤.”

  쿠로오의 혼잣말이 다시금 리에프를 찾았다. 수업 끝나기 직전이거나 이미 끝난 후라 이 건물이 거의 비잖아. 리에프 또한 동의했지만 대답하지는 않았다. 목소리를 따라 바라본 쿠로오는 생각보다 앳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여전히 웃는 낯이었지만 즐거워보이진 않았다. 그렇다면 그의 웃음기는 특유의 습관 아니면 예의일지도 몰랐다. 담배를 쥐거나 턱을 만지는 손에는 자신과 같은 굳은살이 자리 잡고 있었다. 옷차림은 평범했다. 그러나 계절을 잊은 자신의 센스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거기까지였다. 이미 내려앉은 해는 리에프에게 반쪽자리 관찰만을 허락했다.

“너 담배 필 줄 모르는구나?”

  지나치게 집중해 있었는지 어느새 쿠로오가 자신을 돌아보고 있는 것도 몰랐다. 들켜도 상관없는 사실이었지만 왠지 자존심이 상했다. 동시에 아직 어려서, 라고 놀리던 누나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러나 쑥스러움을 숨기기도 전에 쿠로오의 손이 다시 한 번 리에프의 머리칼을 헤집었다. 머리 위에선 알싸한 냄새가 떠다녔다.

2.
  열흘 뒤였다. 쿠로오는 반가움을 숨기지 않았고, 리에프는 당혹스러움을 감추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은 꽤 설레는 일이었다. 그의 옆에는 이전과 같은 책 더미가 자리하고 있었다. 책들의 상태나 쌓인 높이가 그가 학교에 머물렀고, 또 떠나있던 시간들을 짐작케 했다. 리에프는 쿠로오의 손짓에 잠시 고민했다. 그의 왼편에는 책이 쌓여있었고, 오른편은 비어 있었기 때문이다. 망설이다, 책의 높이만큼 쿠로오에게 떨어져 서는 것을 선택했다.

  밤새 내린 비에 주변의 나무들은 꽃잎을 모두 떨군 상태였다. 갑자기 푹해진 날씨에 빗물이 고이진 않았다. 다만, 두서없이 떨어져 섞이고 뭉개진 꽃잎들이 썩 보기 좋은 것은 아니었다. 나무들 역시 녹색도, 붉은색도 온전하게 품지 못한 채 여름을 준비하고 있었다. 가볍게 분 바람에는 축축한 흙냄새가 휩쓸려왔다. 곧 더워지겠다. 어중간한 모양새의 나무들을, 쿠로오는 한참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 이 시간에만 오세요?”
“알바 때문에 지금밖에 시간이 안나.”
“쿠로상은 복학 안 해요?”
“그러게...”
“이제 졸업도 해야 하잖아요.”
“알바하면서 먹고 사는 게 너무 익숙해졌어.”
“몇 학기 남았어요?”
“한 학기? 아마 그럴걸?”

  꽤나 당돌한 질문의 연속이었다. 답을 주면, 문장을 채 마지치기도 전에 다음 질문을 해댔다. 리에프의 반응은 쿠로오의 대답을 들을 때마다 풍부하게 변했다. 미간을 찌푸리거나 입술을 내밀기도 하고, 양 볼은 부풀고 쪼그라들길 반복했다. 왼쪽으로 기울었던 고개는, 어느새 다음 질문에서는 오른쪽에 가 있었다. 가끔 손짓을 섞기도 했다. 그 와중에도 굽은 등은 여전했다. 쿠로오 역시 리에프의 장단에 맞춰주었지만 대답은 불성실했다. 알바, 복학, 졸업. 이제 겨우 3학기차인 리에프와는 관련 없는 단어들이었다. 동시에 만약 내년부터 쿠로오와 함께 학교를 다닌다면, 이라는 가정을 하고 있는 그였다. 물론 고조된 기분은 ‘한 학기’라는 단어에 금방 가라앉았다.

“친구 것도 치워주기로 해서.”

  리에프는 아까부터 쿠로오가 세워둔 책 더미를 보고 있었다. 부담스러운 시선에 묻지도 않은 질문에 답을 했다. 반쯤은 변명의 투였다. 넌 이런 부탁 들어주지 마라. 웃는 쿠로오는 슬쩍 자신의 겉옷으로 짐들을 덮었다. 보쿠토 코타로. 낯익은 이름이 걸렸다. 들어본 적이 있었다. 생각해보니, 작년 신입생 환영회에서 쿠로오의 옆자리를 차지했던 선배가 있었던 것도 같다. 물론 짐작이었다. 이름과 함께 얼굴을 떠올리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얼마 안가 이름도, 노력도, 쿠로오의 질문에 흘러갔다.

“오늘도 한 대 줄까?”

  장난기어린 쿠로오의 말에 지기 싫었다. 리에프는 꽤나 호기롭게 쿠로오의 호의를 받아 물었다. 그러나 빨아들이지도 않은 담배에 제대로 불이 붙을 리가 없었다. 꾸물거리며 입술에 매달린 담배는 자꾸 떨어질 것 같았다. 왼손이 그것을 지탱하느라 부는 바람은 신경 쓰지 못했다. 어색한 자세의 리에프는 자꾸만 꺼지는 라이터 불만을 재차 지필뿐이었다.

“그렇게 피는 게 아니라...”

  쿠로오가 갑작스레 가까워졌다. 동시에 확 타오른 라이터 불에 리에프는 하마터면 손을 델 뻔 했다. 담배를 뺏어든 쿠로오는 그것을 그대로 자신의 입으로 가져갔다. 깊게 빨아들여 패인 볼과 덩달아 접힌 미간. 자잘하게 내리깐 눈이 만들어낸 찰나의 순간은, 리에프로 하여금 점점 고개를 숙이게 했다. 자신의 감정 표현엔 솔직했지만 타인에 대한 반응엔 서툴렀다. 그런 리에프에게는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그의 입에서는 쉽게 불이 일었다. 신기했다. 같은 입인데, 손인데, 그 투박함까지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자신은 미숙했다. 쿠로오는 직접 자신의 손을 리에프의 손 위로 겹쳤다. 그의 손가락 사이에도 담배가 끼워졌다. 쿠로오의 손은 자신의 손등을 모두 덮을 만큼의 크기였다. 어쩌면 더 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리에프의 등판에 닿은 쿠로오의 몸 역시 딱딱했다. 얇은 티셔츠는 숨김없이 한창인 사내의 건장함을 전달하고 있었다. 그 부정할 수 없는 남성성에, 한순간이라도 쿠로오의 표정에 반응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아, 너 너무 키가 커서 힘들어.”

  큰 키의 리에프가 쿠로오에게 안긴, 꽤 우스꽝스러운 자세였다. 리에프의 마른 몸은 긴장으로 움츠러들었지만, 쿠로오는 크게 개의치 않는 듯했다. 그는 겹친 손을 리에프의 입으로 가져갔다. 입에 물어봐. 축축한 담배 끝이 민망했다. 그대로 쭉 빨아봐. 볼 한가득 연기를 머금고 뿜었다. 코가 아려왔다. 터지는 기침은 억지로 참았다. 아니, 머금지만 말고 숨을 들이 마시란 마랴. 응, 그렇지, 그렇게. 쿠로오의 정정을 실행에 옮겼다. 그러나 리에프의 시도는 멋지게 마무리되진 못했다. 

  가장 먼저 안을 모두 게워낼 것 같은 구역질이 올라왔다. 거친 기침은 목구멍을 긁어댔다. 코끝은 아리다 못해 매웠고, 반사적으로 눈물이 맺혔다. 입안에는 기분 나쁜 쓴맛이 맴돌았다. 배도 아팠다. 고개를 든다고 해서 상태가 나아지는 것도 아니었다. 일단 어지러웠다. 가만히 서 있기조차 어려웠다. 세차게 머리를 흔들면 눈앞이 더 흔들렸다. 어느새 담배를 태우고 있었는지, 쿠로오가 내뿜는 연기에 눈앞이 흐렸다. 그가 잡히다, 말았다 했다. 사실 연기 탓인지, 똑바르지 못한 시야 탓인지 구분이 안 갔다. 어쨌든 쿠로오는 웃고 있었다.

  휘청거리는 그에게 먼저 손을 내민 것은 쿠로오였다. 리에프 역시 그가 빌려준 팔을 거절하지 않았다. 쿠로상, 이게 뭐에요? 횡설수설한 와중에 아무 말이나 뱉었다. 뭐긴 뭐야. 담배지. 쿠로오의 대답은 여전히 불성실했고, 여전히 친절했다.

3.
  세 번을 더 마주쳤고, 세 번을 더 마주칠 수 있었던 시간 동안 만나지 못했다. 리에프가 마지막 계단을 올랐다. 쿠로오는 이제 막 새 담배를 꺼내던 참이었다. 발밑에 떨어진 꽁초들은 그가 기다린 시간을 알게 했다.

“다행이다. 못 볼 줄 알았어.”

  저번 주, 이번 주 내내 학교 왔었는데. 어색한 웃음의 쿠로오는, 조심스럽게 말끝을 흐렸다. 그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움츠러든 리에프의 어깨에 조금은 힘이 들어갔다.

“잘 지냈지?”
“아팠어요. 조금.”
“살이 내리긴 했네.”

  쿠로오의 손이 리에프의 볼에 닿았다. 갑작스런 움직임에 리에프는 황급히 몸을 뒤로 뺐다. 동시에 과도하게 반응한 자신을 원망했다. 그가 쿠로오에게 보이고 싶은 반응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쿠로상 보면 마음이 이상해요. 리에프가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아프다는 것은 핑계였다. 복잡한 마음에 뒤척이면서 2주나 허비했다. 친구의 이야기라며 주변에 물어도 보고, 인터넷도 뒤졌다. 결국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그냥 ‘이상하다’는 것이었다. 

  쿠로오가 친절한 게 짜증났다. 선배인 것도 불편했다. 항상 웃는 낯이었는데, 단 한 번도 진심이었던 적이 없었던 것도 마음에 걸렸다. 그런데 학교에 오면 그부터 떠올렸다. 하루에 몇 번이고 그곳에 들렸다. 쿠로오가 오지 않는 날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딱히 약속을 한 적도 없었다. 짐을 모두 치웠다면 아예 오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리에프는 계단을 올랐고, 그때마다 실망했다. 일단 리에프는 이 감정을 ‘궁금하다’로 정했다. 보고 싶은 것으로 정의하기엔 본인이 억울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이것도 처음에는 학교에서만 그랬다. 견딜 만했다. 이때까지는 쿠로오의 생각을 쉴 수 있는 ‘틈’이 있었다. 그런데 기대와 실망이 수없이 반복되면서 알 수 없는 감정이 됐다. 지금은 어디서든 그랬다. 이제는 틈이 생기면 쿠로오를 떠올렸다. 질투의 대상이 명확하지 않음에도 질투했고, 원망의 대상이 없음에도 원망했다. 틀어박힌 2주 동안 가장 화가 났던 것은, 자신이 쿠로오의 번호를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쿠로오 역시 리에프에게 번호를 묻지 않은 것에 침울해했다. 리에프에게는 어려운 문제였다. 그래서 결국 또 여기로 왔다. 쿠로상, 저 이상해요. 말하고 싶었다. 그러면 자신보다 어른인 쿠로오는 답을 줄 것 같았다.

“나 학창시절 별명이 고양이었거든.”

  쓸데없이 생각이 길었다. 리에프는 쿠로오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담을 타 넘는 새끼 고양이가 있었다. 검은 털에 꼬리에만 눈이 내렸다. 몸을 바짝 낮추고 앞으로 기는 것이 조금은 위태로워 보였다. 쿠로오는 고양이를, 리에프는 그런 쿠로오를 바라보았다.

“근데 굳이 동물이어야 한다면 역시 날 수 있는 게 좋겠어.”
“아니에요!”

  미묘한 표정의 쿠로오가 돌아보았다. 지금 보니 살이 내린 것은 자신이 아니라 쿠로오였다. 간만에 정면으로 마주한 그의 얼굴. 리에프는 또 지나치게 허둥거렸다.

“쿠로상은...고양이가 잘 어울려요.”

그제야 뾰족한 눈매와 입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안심했다.

“쟤, 니가 가끔이라도 챙겨줘.”

  그리고 이거 너 가져. 은근히 책임을 떠맡긴 쿠로오는 바로 말을 이어갔다. 리에프의 손바닥에 놓인 것은 쿠로오의 지포 라이터였다. 리에프는 당황했다. 연신 라이터와 쿠로오를 번갈아보았다. 나 이제 담배 끊으려고. 이번에도 쿠로오가 선수를 쳤다. 원래 눈치가 빠를 수도 있었다. 아니면 고작 몇 년 더 산, 아직은 새파란 어른의 직감일수도 있었다. 뭐가 됐든, 진심과 인사치레조차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리에프에게는 그저 신기한 대처였다.

  그럼에도 쿠로오의 말은 적절한 답이 되어주지 못했다. 움찔거리는 입이 제대로 떨어지지 않았다. 지금이 적당한 타이밍인지도 모르겠다. 이러다 또 놓칠 것 같았다. 지금쯤 쿠로오는 먼저 자리를 뜨곤 했다. 계단으로 걸음을 옮기는 쿠로오. 뒷걸음질 치며 손을 흔드는 쿠로오. 그리고 곧 등을 보이는 쿠로오. 리에프는 조급했다. 붙잡는 손이 빨랐다. 부르는 말은 나중이었다. 쿠로상,

“안 와요?”

  한 번 더 말했다. 이제 여기 안 와요? 리에프 본인도 놀랐다. 가장 먼저 들이밀어진 말은, 자신의 진심도, 쿠로오의 번호도 아니었다. 다음을, 혹은 그 다음을 기약하는 질문이었다.

  항상 궁금했다. 그리고 걱정했다. 그가 왜 복학하지 않는지, 남아도는 사물함을 굳이 비우는 건지, 아직은 필요할 책들을 처분하는 건지, 그러니까 왜, 학교를 그만두는 건지. 마주치는 날이 늘고, ‘이상한’ 마음이 커질수록 더 묻지 못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리에프는 쿠로오를 붙잡을 수 있는 어떠한 것도 가지지 못했다. 그에게는 명분이 없었다. 고작 몇 번을 마주친 사이였다. 쿠로오에게 그는 한참 어린 후배정도일 것이다. 잘해봐야 후배 앞에 친하다는 말이 붙을 뿐이었다. 리에프의 표현대로 억울한 일이었다.

  쿠로오는 그의 질문을 이해한 것 같았다. 거기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대신 되도록 천천히, 리에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가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의 위로였다. 아마 자신은 울상일 것이다. 울지도 몰랐다. 처음에도 그랬다. 덜 여문 청년은 즐거움보다 슬픔을 숨기는 것을 어려워했다. 그러나 어설픈 시간은 무엇을 밝게 비추지도, 어둡게 가려주지도 않았다. 그저 넘치지 않을 만큼 두 사람의 진심을 공평하게 나눠주었다.

4.
  일본 배구 유망주 보쿠토 코타로 사망. 경기 도중 사고. 1년여 간의 식물인간 생활. 가족의 결단. 기증. 의 단어들. 아무도 보지 않을 스포츠란 구석을 채우고 있는 기사. 단 몇 줄의 글에는 사진조차 실리지 않았다. 리에프는 끝까지 보쿠토의 얼굴을 떠올리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생김새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이제야 살랑거리던 꼬리를 간신히 묶어두고 있던 것이 새의 껍데기였음을 확답 받았기 때문이다. 리에프는 여전히 얼굴도 모르는 이에게 질투를 느껴야 했다.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사실이었다. 도망간 새끼를 찾는 것도 그만 두었다. 제가 있을 곳을 찾아간 고양이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이것 또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 감정의 원인을 찾아 원망하고 싶었다. 그러나 애초에 누구를 탓할 만큼 리에프는 모질지 못했다. 원망을 설움으로, 그리고 다시 그리움으로 바꾸는 편이 나았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 울 수 있는 특권을 가진 유일한 자로서 조용히 그의 죽음을 애도할 뿐이었다.

 


고양이가 바닥에 몸을 뉘였다. 떨어진 새는 외롭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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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하는 무게 (현실 AU)

 


  추락하는 무게를 한 손으로 붙잡는 건 버거웠으나 막상 손을 놓자 떨어지는 건 순간이었다. 땅에 닿는 건 쉬웠다. 생각처럼 큰 소리가 나는 것도 아니었다. 피는 조용하게 배어 나왔고 그의 몸은 고작 한두 번 경련할 뿐, 이내 멈추었다. 나는 건물의 옥상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수 년 간의 다툼이 결국엔 그의 승리로 끝나는 순간이었다.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죽은 이도 지르지 않은 비명을 그들이 대신 했다. 누군가는 구급차를 부르는 것 같았다. 급하지 않게 걸어 내려갔다. 금세 몰려든 이들이 만든 몇 겹의 벽은 겨우 그의 목덜미와 손목, 운동화 정도만을 보여주었다. 죄송합니다. 첫 번째 구경꾼은 순순히 물러났다. 잠시 만요. 두 번째 여고생들은 의아해하며 수군거렸다. 제가 보호자입니다. 그제 서야 인파의 숲이 술렁거리며 안타까움이나 탄성과 같은 소음들을 토해내며 물러섰다.

  능숙하게 그의 몸을 추스렸다. 먼저 돌아간 고개를 바로 잡아 주었다. 반쯤 뜬 눈은 그 때 감겼다. 제각기 떠도는 두 팔은 그대로 두기로 했다. 대신 올라간 티셔츠를 내렸다. 꽤 오랜 시간 수면제와 진정제로 늘어진 그를 챙겨왔기에 그리 어렵거나 번거로운 일은 아니었다. 여긴 너무 시끄럽다. 둘 만 있는 곳으로 갔으면 좋겠다. 그 말을 하자마자 신기하게 눈물이 터졌다.

  꿈은 항상 여기까지다. 대신 누워있는 긴토키에게 건네는 말은 때에 따라 다르다. 그리고 바뀌는 말이나 장면을 의식할 때도 있고 오늘처럼 모르고 지나갈 때도 있다. 신기한 것은 붙잡아도 질책하지 않을 꿈에 그의 죽음을 막아 본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단 사실이다. 똑같은 꿈을 몇 번이나 반복하다 보니 이제는 정말 그가 죽었을 때 뭐라고 했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제대로 가늠하기 어려웠다. 식은땀이 마르면서 급격하게 추워졌다. 의자위에 걸쳐둔 겉옷을 빼들었다. 더운 물을 마셨다. 참다못해 약을 먹었다. 그래도 달아난 잠은 쉽게 찾아 들질 않았다. 왼손목이 아팠다. 반복해서 하얗게 불거진 흉터를 매만졌다. 이것 또한 그가 승리한 증거라면 증거였다.

“우울증. 그거 별 거 아니래.”

  처음에는 둘 다 그렇게 생각했다. 요즘 다들 조금씩 있는 거래. 초조해하는 그에게 할 수 있는 말은 고작 어디선가 주워들은 잡다한 충고들과 웃음 띤 위로뿐이었다. 평소처럼 대하려고 노력했고 최대한 그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고자 마음먹었다. 하루 종일 잠을 자거나 끼니를 걸러도 타박하지 않았다. 집안일이 모두 내 몫이 되어도 별 불만 없이 해 나갔다. 동거를 한다는 사실이 무색하게 한 마디도 나누지 않는 날들이 늘어났다. 이제 출근 전과 퇴근 후, 그의 코나 입가에 손가락을 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정말이지 ‘생존확인’이었다.

  그런 긴토키가 갑작스럽게 복학을 결정한 것은 진단을 받은 지 3개월쯤 되었을 때였다. 조금 더 고민해 보자고 그를 설득했지만 상의 전에 이미 서류를 제출한 후였다. 허락해 줄 거지? 나 이제 안 아파. 과도하게 들뜬 그에겐 우울증이라는 병력조차 무색해 보였다. 서서히 말과 움직임이 늘었다. 스스로 장을 보고 요리를 하는 날도 있었다. 학교생활도 곧잘 해나가는 듯 했다. 가끔씩 이전과는 다르게 지나칠 정도로 흥분하거나 화를 냈지만 이 정도는 감당할 수 있었다. 이전처럼 사랑한다고도 했다. 너 때문에 행복하다고 했다. 내가 그를 살아있게 한 거라고도 했다. 별 것 아닌 이야기들을 장황하게 늘어놓으며 웃는 그를 보면 누구에게든 고맙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였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거꾸로 밟아가 그가 화장실을 피투성이로 만들어 놓기까지 다시 5개월이 걸렸다.

  옮긴 병원에서는 그가 우울증이 아닌 조울증이며 이전에 항 우울제가 듣지 않았던 것도 그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앞으로 극단적인 증세를 자주 보일 수 있다며 그의 반복될 행위를 돌려 말해주었다. 실제로 한 동안 지속되었던 조증은 최악의 상황을 예고한 전조일 뿐이었다. 뭐든 첫 시작이 어렵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이후는 불안함과 안도, 분노와 설득의 연속이었다. 내가 그에게 무릎을 꿇은 것처럼 그도 나에게 빌었다. 날 죽게 해줘. 너만 허락해주면 돼. 긴토키의 소원은 지나치게 직설적이고 단순했다. 약을 빼앗을 수밖에 없었다. 이후 그의 손목에는 흉터가 늘었다. 그를 묶어두거나 방에 가둬둔 적도 있었다. 그랬더니 혀를 깨물려고 했다. 그의 소지품은 될 수 있는 대로 모두 버렸다. 그때 처음으로 사람이 죽을 수 있는 방법은 수없이 있음을 깨달았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뒀다. 최대한 집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했다. 밖에 있는 시간보다 그의 마른 몸을 끼고 있는 날들이 늘었다. 그렇게 그를 안고 있을 때, 맞닿은 고동들이 엇박으로 뛰다 이내 맞춰지면서 튀어 오르는 평온함은 우리의 상황을 잊게 할 정도로 행복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간헐적으로 찾아오는 찰나는 그의 말 한마디면 쉽게 수그러들었다. 

“내일은 눈이 안 떠지면 좋겠다.”
“또 헛소리한다. 그런 소리 좀 그만해.”
“이대로 죽었으면 좋겠어."
“차라리 수면제를 먹어.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마.”

  살아만 있어줘. 항상 같은 말로 끝났다. 이에 대한 긴토키의 대답 또한 정해져 있었다. 내가 죽지 못하는 건 너 때문이야. 그러나 생의 이유도, 죽음의 조건도, 모두 내가 쥐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후에는 섣불리 나를 위해 살아달라는 말조차 하지 못하게 됐다. 그가 끝까지 자신을 놓지 않길 바랐는지는 모르겠다. 남겨진 이들 특유의 쓸데없는 고민일 것이다. 다만 그가 그날 입고 있었던 옷이 내가 준 선물이었던 것은 기억한다. 계속해서 손을 잡고 있었다. 사랑한다고도 했다. 너 때문에 행복했다고 했다. 망설임 없이 낙하하던 것도 선명하다. 그리고 허락의 말을 후회하며 중력을 따라 계속해서 기우는 몸을 억지로 일으켰을 때, 그는 다시, 끝까지 붙잡아줘서 고맙다고 했다.

  오늘은 확실한 꿈이다. 별다른 다툼도, 그를 붙잡고, 애원하고, 망설였다 다시 울며 매달리던 수어번의 과정도 없었다. 그날은 이렇게 차분하지 않았다. 이렇게 조용하지도 않았다.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는 그는 난간 위로 올라서기 직전이었고 나는 계단 아래에서 입맞춤을 끝낸 직후였다. 이제 곧 나 또한 따라 올라가야 했다. 그리고 잠시 숨을 멈췄다 그가 떨어지면, 내가 놓아주어야 했다. 매번 그 순간이 가장 힘들었다. 그러나 지금이라면 그 때는 묻지 못했던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여전히 반복되는 꿈에서도 듣지 못한 대답이 있다.

“내가 잘한 걸까?”

  내가 필요한 것은 위로나 사랑 고백 따위가 아닌, 살아있음을 인정받을 수 있는 면죄부였다. 환영에 매달리면서까지 살고 싶은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내가 그를 ‘놓았다는’ 사실은 변함없었기 때문이다. 긴토키는 자신이 죽지 못하는 것은 오로지 나 때문이라고 했다. 그랬던 그가 죽었다. 내가 허락했기 때문이다. 결국엔 내가 그를 죽였다. 애써 외면해온 꿈에서조차 그것만큼은 유일하게 불변하는 장면이었다. 다시 한 번, 이번에는 그가 원했을지도 모르는 결말을 물었다.

“아니면 나도 같이 죽을까?”

  돌아본 그는 웃었고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 이번 연성은 왠지 모르게 너무 오래 걸렸어요...심하게...고작 에이포 세 장인데 낑낑거리면서 썼네요. 흑 이런데서 실력 차이가 나나 봅니다.

+ 긴토키를 따라 죽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용기가 없어 매번 죽지 못하고 자기 합리화를 하는 히지카타. 그리고 그의 죽음을 방조했다는 죄책감에 항상 악몽에 시달림. 그리고 결국 수없이 하는 질문에 꿈속의 긴토키는 물론 본인 스스로도 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음.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아무도 대답하지 않은 것’은 그 때문. 결국 히지카타카 감당해야 하는 건 긴토키의 무게뿐만이 아닌 것....그런데 생각해보면 자신은 원하는 대로 했으면서 그 이유를 모두 히지카타에게 돌린 긴토키가 어찌 보면 정말 잔인한 사람일수도...

+ 저도 포카포카한 히지긴 써보고 싶고요. 달달한 타카긴 써보고 싶습니다....그런데 취향 진짜 오져서 이런거 말고는 뭐가 1도 안나오네요... 흑흑

+ 아 그리고 존잘님 어떤 분이든 히지긴 온리전 열어주셨으면 좋겠어요ㅠㅠ 타카긴 교류전도요ㅠㅠㅠㅠ 긴수 온리 끝나고 여름쯤이면 딱 좋지 않나요? 제 생각인가요? 네? 다들 원하시는거죠?ㅠㅠㅠㅠㅠ

+ 본격적인 원고 전 손풀기용이라 당분간은  티스토리에 뭐가 안 올라올 수도 있겠네요. 그럼 긴토키 온리전에서 봬요! 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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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지긴타카] 반쪽씩

2015. 12. 13. 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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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카긴] 벌레들

연성 2015. 10. 24. 22:10 |

벌레들


  낮은 천장의 비좁은 방은 어설프게 엮인 짚단이 가리고 있는 창밖보다 더 어두웠으며, 어긋난 창틀이 내는 기분 나쁜 소리보다 두 사내가 부딪치고 엉키어 생기는 마찰음이 더 컸다. 바닥부터 올라오는 곰팡내와 벽을 가득 채운 습기에 방 전체는 흡사 물에 푹 젖은 듯했다. 유일하게 머리맡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던 화로 위 불씨가 달아날 때쯤, 위태롭게 두 팔로 상체를 지탱하고 있던 긴토키는 억지로 밀고 들어오는 묵직함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이불 위로 엎어졌다. 괴로워하는 것 같았지만 허덕거리는 숨소리조차 감히 허용되지 않은 먹색의 방에선 이를 확인할 길이 없었다. 얼굴을 파묻고 날숨을 터트릴 수 있던 것도 잠시, 긴토키의 등허리를 마구잡이로 짓누르던 다카스기의 손이 그의 머리채를 한껏 잡아 올리고, 그것이 시작이었다.

  온몸을 우겨넣는다는 표현이 적확할 정도로 다카스기의 움직임은 교합이라기보다 일방적인 폭력에 가까웠다. 긴토키의 머리채를 잡았던 다카스기의 손이 목을 조르고, 한껏 젖은 뺨을 때리고, 양 팔을 뒤로 꺾어 상체를 들어 올릴 때까지 긴토키의 몸은 움츠러들고 비틀렸으며, 때로는 할 수 있는 만큼 합을 맞추려 노력하다 이내 포기하고 허우적거렸다. 마음대로 벌어지는 입에서 흘러나온 건 사람과 짐승, 그 어딘가의 어설픈 소리였다. 갑작스레 양팔을 놓아버린 다카스기에 정점까지 들려 뻗대던 긴토키의 상체가 꽤 큰소리를 내며 바닥에 부딪쳤지만 이를 신경 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긴토키는 다카스기를 피했고 다카스기는 긴토키를 원망했다. 그도 그럴 것이 쇼요의 첫 제자는 긴토키였지만 아이들 중에 그를 가장 동경하고 따른 건 다카스기였으며, 셋 중 한 명이 쇼요의 뒤를 따라 서당을 잇는다면 그건 의외로 다카스기 일거라고 모두가 동의하는 바였기 때문이다. 주변에서는 긴토키를 향한 다카스기의 분노가 스승을 죽인 대가치고는 비교적 값싼 거라 수군댔지만, 두 사람 모두 이 이상으로 긴토키가 치를 수 있는 ‘대가’는 없으리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실제로 다카스기가 ‘눈’을 뜬 이후, 무섭게 퍼붓던 욕설이 침묵으로 바뀌고 멱살을 잡았던 손에 칼이 들리기까진 채 보름이 걸리지 않았다. 

  둘의 임시거처는 빈민가에서도 끝자락, 두 어 번 헤매고 서 너 번 길을 잃어야 찾아갈 수 있는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해 있었다. 마당이라고 칭하기도 뭣한 둘레를 감싼 잡풀과 덩굴들은 마루 아래까지 침범해 있었고, 이미 안방은 무엇인가가 머물고 간 흔적이 곳곳에 묻어 있었다. 가난의 썩은내와 병든 공기가 밤낮 상관없이 코끝까지 차오르던 곳에서 두 사람은 전쟁영웅에서 반역자가 되었고, 반역자에게는 재판 없는 즉결처분의 명이 떨어졌다. 긴토키가 다카스기를 돌본 보름이라는 시간은 그들에게 어떠한 말미도, 변명도 만들어주지 않았다. 

  누구도 다카스기를 붙잡지 않았다. 붙잡을 이가 없었다. 사카모토는 이미 전장을 떠나 연락이 끊긴지 오래였고, 가츠라는 도주 중이었으며, 유일하게 그의 곁은 지킨 긴토키는 그것이 자신에게 과분한 책임이라 여겼다. 몸을 추스른 다카스기가 대열이 정비되었다는 반사이의 전언을 받아 문 밖을 나 설 때까지, 긴토키는 그저 유성처럼 화려하게 부서지는 폭격의 잔해를 휘어잡고 있을 뿐이었다. 마당 곳곳에 패인 물웅덩이에 연신 파장이 일었다. 집을 둘러싼 수풀 주변이 번잡했다. 그 사이로 작지만 분명한 비명소리들이 파고들었다. 이제 이곳도 안전하지 않다는 신호였다. 여전히 긴토키는 의미 없는 손짓을 반복했고, 그곳에서 등을 돌린 다카스기는 여러 번 옷매무새를 고칠 뿐이었다. 제가 움직일 때까지 기다린 그의 의도는 뻔했다. 분명 자신이 도망칠 때까지 시간을 벌고, 끝내는 그들에게 스스로를 내어 줄 생각인 것이다.

  스승을 죽인 그를 원망했다. 어떠한 식으로든 자신만큼 괴로워 할 그를 원했다. 그것이 육체가 된다면 자신이 끝을 낼 것이고, 정신이 된다면 스스로를 도려내고 싶을 만큼 한계까지 몰아넣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동료였던 그는 사랑했다. 벗이든 정인이든 원수든, 무슨 이름으로 부르고 불려도 두 눈을 뜨고 감았던 자신은 여전히 그를 사랑했다. 어떤 명분이 되었든 그가 비참한 자신의 생을 이어나가길 바랐다. 물론 그것은 ‘살아있다면’이라는 전제가 붙은 바람이었다.
 
“세 달에 한 번이다.”

  이곳에서 들을 수 있었던 최초의 말소리였다. 이에 긴토키는 크게 놀라지도, 반응하지도 않은 채 느릿하게 정면을 응시했다. 그날 이후 처음으로 마주 본 그의 몰골은 폐허와 다름없었다. 항상 전장의 흔적이 묻어있던 백의는 이제는 망령이 깃든 것처럼 군데군데 헤져 그의 마른 몸만을 겨우 가리고 있을 뿐이었다. 백발에 가깝게 세어버린 은발은 그 끝에서부터 이미 바스라지고 있었다. 몇 번이고 초점을 놓치는 그의 눈은 또 다른 의미의 야차와 같았다.

“우린 언젠가 말라 죽을 거다.”

  더 이상 서로를 괴롭게 만들지 말자는, 다카스기의 ‘명령’에 에둘러서 꺼낸 그의 대답이자 그들의 끝에 대한 직설적인 경고였다. 이 곳이다. 다카스기가 다시 한 번 말했지만 이미 긴토키는 그의 말을 듣지 않는 듯했다.

“그러다 둘 중 한 명이 고꾸라질 때까지 서로를 파먹다 뒤질 거다.”

  사실 다카스기 자신도 두 사람이 다시 만나야 하는 곳은 이따위 은밀한 장소가 아니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이곳이 아니라면 마주 본 그들에겐 응당 칼이 들려있을 것이며, 그것이 향할 곳은 정해져 있었다. 반박할 여지없는 당연한 수순이었다. 지금까지 수 없이 사랑한다고 이야기 했지만 결국엔 서로 때문에, 서로에게 죽게 될 것이다.

  세 달에 한 번. 결과적으로 긴토키는 그의 말을 따랐다. 그는 이 모든 게 업보라 생각했다. 스승을 죽인 것, 동료들의 믿음을 배신한 것, 검을 쥔 것, 애초에 살아남은 것. 구차한 변명이나 자잘한 감정의 토로로는 풀 수 없는 속죄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카스기는 둘의 관계를 꽤 손해 볼 것 없는 거래라고 생각했다. 자신은 그를 살아남게 하고 그는 자신의 죄책감을 던다. 이것은 적어도 동등한 교환일 것이다. 그런데,

 


  그가 운다. 처음으로, 밀회 아닌 밀회를 갖기 시작한 지난 몇 년간 이후 처음으로, 누군가가 이 방에서 소리를 냈다. 밀리고 밀려, 이제는 더 이상 도망칠 수 없을 정도에까지 다다른 나체의 긴토키는 몸을 둥글게 말고, 울고 있었다. 암묵적으로 지켜져 오던 이 공간의 규칙 중 하나가 깨지는 순간이었다. 처음에는 당황했고, 곧 화가 났으며, 이내 허덕이며 금방이라도 익사할 것처럼 숨을 몰아쉬는 긴토키의 볼에 다카스기의 손이 내리꽂혔다. 그리고 같은 행동을 두 어 번 반복하다 너덜거리는 그 몸에 다시 자신을 틀어박았다.

  그때 창문을 가리고 있던 짚단이 떨어지면서 밤빛이 들어와 누워있던 긴토키의 몸을 비췄다. 난도질당한 굵직한 흉터들. 그 사이로 불거진 등뼈. 목덜미와 손목 위의 손자국은 금세 싯푸른 멍이 됐고, 붜오른 양 볼은 물기에 젖어 더욱 도드라졌다. 어디하나 성한 곳이 없는 마른 몸은 자신이 낸 것이 분명한 상처들과 뒤섞여 제 색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제 서야 다카스기는 두 사람이 겨우 몸을 뉘일 수 있는 이 작은 공간에서조차 누구도 행복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우리는 말라 죽을 거다. 그 때는 알지 못했다. 조금이라도, 구질구질하지만 어떠한 방식으로든 서로에게 묶여있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둘 중 한 명이 고꾸라질 때까지 서로를 파먹다 뒤질 거다. 자신이 역겨운 벌레가 되어 그의 살덩이를 양식으로, 응당 치러야 할 졸렬한 대가로 요구해가며 씹어 삼키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러나 위로를 위해 뻗은 손을 거두었다. 그의 이름을 곱씹다 이내 부르기를 그만두었다.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그는 바닥에 누워 있었고 자신은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차피 세 달 뒤 이곳에서 그때처럼 몸을 부대끼고 있을 그들이었다. 말라죽을 거라면, 함께 썩는 편이 나았다. 이제는 쉰 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긴토키를 바라보며, 다카스기는 자신의 집착이 그를 죽이고, 그의 원망이 점점 자신을 파먹고 있음을 느꼈다.

 

 

 

 

 

+ 진짜 시간을 쪼개고 쪼개고 또 쪼개서 나온 글....분량은 적지만 쓰는데 왜이렇게 시간이 오래 걸렸는지 모르겠습니다....물론 퀄리티도 장담할 수 없어서 슬픈것...흑....더 길어질 줄 알았는데....

+ 소년의 밤이랑 조금 내용이 연결되는 것 같아요. 쇼요가 죽기 전까지 서로 사랑인지 동료애인지 단순한 욕정인지 가끔 사랑한다는 말을 장난스럽게 하면서 잠자리를 가지다가 그 일을 계기로 헤어지게 되는거죠. 이후 다카스기는 긴토키에게 제안을 하게 되고 어쩔 수 없이 긴토키는 그에 응하게 되는거. 역시 그런 관계에 서로 상처를 받다 긴토키가 터트리는...그런 내용입니다. 여기에 현 애인으로 히지카타를 껴 넣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 원래 이 연성의 시작은 어느 분이 트윗에 타카긴 연성 키워드라고 올리신 유하 시인의 시구절 '우리는 익사할 것이다. 바닥에 즐비한 다른 연인들처럼'에서 모티브를 따온 건데 결국 그 구절은 1도 안들어가고 멋대로 연성했네요ㅠㅠ그래도 그 때 기꺼이 키워드 사용 허락해주신 그 분께 감사 인사 드립니다.

+ 뒤늦게 긴수 온리전 참여 신청을 했는데 반부스 자리가 나올지 모르겠어요ㅠㅠ 반부스가 나온다면 19금으로 히지긴/타카긴 한 권씩 들고 나가고 싶은데ㅠㅠ(물론 둘 중 완성되는 것만 들고 나갈 가능성이 크고 히지긴이 될 가능성이 더 크겠지만...ㅋㅋㅋ...ㅋㅋㅋㅋ...) 흑흑 자리 꼭 났으면 좋겠어요...저도 존잘님들 사이에서 부스 입장 해보고 싶어요ㅠㅠㅠ 흑흑흑

+ 아 요즘 타카긴 뽕차올라서 죽을거 같습니다...전 분명 히지긴러...그런데 호모취향은 타카긴....로레니 미움....허로렌...이를 어떻게 해야 좋을지...흑흑 둘다 너무 좋아 죽어요ㅠㅠ긴른 긴수 히지긴 타카긴 만세ㅠㅠㅠㅠㅠ 흑흑흐극ㅎ그 ㅠㅠㅠ 저랑 썰 풀고 놀아주실 분 항상 모집중입니다 놀아주세요ㅠㅠㅠㅠㅠㅠ 아 그리고 별거 없는 이 곳까지 찾아주셔서 부족한 글 읽어주시는 분들 정말 감사드립니다. 언젠가...또 봐요...종강전에...하나 더 쓸 수 있겠죠...후후

Posted by Ha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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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의 밤


  동기들 중 가장 늦게 열아홉 살을 넘긴 건 사카모토였다. 고작 몇 달 차이로 위아래를 나누는 것도 웃겼지만, 엄밀하게 따진다면 무리들 중 가장 애송이 녀석이었다. 그런데도 대담하게 유곽에 갈 것을 제안한 건 뒤늦게 나이를 따라잡은 사카모토였고, 관심을 보이며 바람잡이 역할을 한건 긴토키, 바짝 긴장하며 얼굴을 붉힌 건 가츠라였다. 돈 걱정은 말라느니, 이 상황에서 돈이 문제가 아니라느니, 지금이야말로 적절한 ‘동기부여’가 필요한 시점이라느니, 전장에서의 활약이 무색할 정도로 여전히 ‘계집’이라는 단어에 호기심과 쑥스러움을 내보이는 그들은 아직은 퍼런 소년들이었다. 
 
  막부와 천인들 간 뒷거래가 있다는 소문이 나돌며 전쟁이 소규모 국지전 양상으로 바뀌면서 소강상태로 접어든 건 꽤 오래된 이야기였다. 그래도 엄연한 전시상황이었지만 느슨해 진 틈을 타 가장 먼저 활기를 띄기 시작한건 술장사와 물장사였다. 귀병대 나으리, 귀공자 나으리. 여기저기서 소위 ‘전쟁영웅’이었던 그들을 나긋나긋한 목소리와 살랑거리는 손짓들이 붙잡았다. 막부에 대한 불신과 천인에 대한 분노가 컸던 장사치들은 더럿 그들에게 돈 걱정 없이 놀고 가라며 끌어당기기 바빴다.

  의외로 붙잡는 목소리들 사이에서 ‘백야차’가 없었던 것은 그네들 중 진짜배기 ‘전쟁영웅’이 바로 사카타 긴토키였기 때문이다. 수려한 외모의 가츠라나 독립된 부대를 이끌었던 다카스기, 화술과 지략에 능했던 사카모토와는 달리 자기 몸 하나가 전부였던 그였다. 실은 그가 막부의 핏줄이라느니, 기집이라느니, 전쟁의 두려움이 만들어낸 허상의 인물이라느니, 백야차에 대한 무성한 소문들은 되려 그네들에게 괴물의 존재를 유명무실하게 만들어버렸다. 한 번씩 그것에 대해 동료들에게 불만을 터트리던 그였지만 그것이 진심이 아니라는 것 또한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가 선택한 유녀가 새초롬히 자신을 선택하는 것에 변명과 억울함을 늘어놓는 긴토키를 보며, 다카스기는 그렇게 생각했다. 

  기집에게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굳이 돈을 지불하고 여자를 살 정도로 궁한 것도 아니었다. 이끄는 부대에게도 적당한 유희와 사기가 필요하다며 자신을 설득한 사카모토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언제까지 분노를 원동력 삼아 전투를 이어갈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분노, 원망, 두려움과 나라를 위한 다는 대의명분 같은 것들. 애초에 다카스기가 전쟁에 참여한 것은 그런 것을 좇아서가 아니었다. 언제든 할복할 준비가 되어있던 가츠라와는 달리 그에게 전쟁터는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할 이유밖에 없는 곳이었다. 다카스기에게 지지부진한 힘겨루기를 해야 하는 동기는 선생님과 전장 한 가운데 서 있는 긴토키. 그거면 충분했다.

  자신을 선택한 유녀에게 미안한 마음에서라도 억지로 세워보려 노력했지만 전혀 동하지 않았다. 방싯방싯 웃는 얼굴과 두꺼운 화장에도 숨길 수 없는, 이제 막 벗기 시작한 땟자국과 가난, 여전히 남아있는 절박함, 앳된 얼굴이지만 자신보다 족히 열 살은 많아 보였던 비쩍 마른 손이 다카스기에게 새삼 그가 있어야 할 위치와 허무함을 느끼게 했다. 아직 스물도 되지 않았던 청춘들이 지고 있던 나이의 무게는 하룻밤 유희에도 쉽게 져 버릴 수 없는 그런 것이었다.

  표면적인 이유가 그것이었다면 진심에 가까웠던 것은 긴토키였다. 다카스기에게 듬성듬성 붉은 핏자국과 전투의 먼지가 가라앉은 그 애의 지저분한 은발보다, 촌스러운 농담보다, 웃음과 몸짓보다 그를 동요하게 하는 것은 없었다. 처음에는 쇼요의 제자들이 모두 그렇듯 스승의 뒷모습을 따라갔다. 이후 쇼요의 가장 가까운 곳에 서 있던 긴토키를 바라보기 시작한 건 철이든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이유야 어찌됐든 다카스기는 결국 유녀에게 비밀로 할 것을 부탁하고 돈을 쥐어 내보내야 했다.

  11월의 겨울이 춥지 않은 에도의 밤이었다. 다들 열심히 임무 수행 중이려나. 막 눈이 쌓이기 시작한 툇마루에 앉은 다카스기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어떻게 여자를 안을지, 어떤 말로 시작할지 등의 별 소득 없는 망상뿐이었다. 긴토키는 자신의 유녀를 그에게 빼앗겼다고 분노했지만 실상 패배감을 느껴야 했던 것은 다카스기 본인이었다. 갑작스레 인기척을 느낀 건 한참을 내리던 눈이 그친 후였다. 감은 눈에도 본능적으로 허리춤의 칼집부터 더듬었다. 익숙한 발걸음이 아니었다면 이내 뽑아들었을 것이다. 아무리 덜 깊어진 계절이었지만 긴토키는 백의의 앞섶을 반쯤 헤치고 얇은 겉옷만을 걸친 채였다. 그 모습에 반가움보다 앞선 것은 초조함이었다.

“나도 한 모금만.”
“너 담배 태웠냐?”
“아니, 성인식 기념이야.”

  다카스기의 옆에 자리를 잡은 긴토키는 대뜸 그의 입에 물려 있던 담뱃대를 뺏어 들었다. 그리고 미간을 한껏 찌푸리며 몇 모금 빨아들이더니 이내 기침을 해대매 손을 휘휘 젓는다. 이게 왜 좋은지 난 모르겠다. 그의 혼잣말에 다카스기는 별 대꾸 없이 다시 담뱃대를 건네받았다.

“너 세우지도 못한 거 아냐? 왜 이렇게 빨리 나와 있어.”
“넌 조루냐? 몇 분이나 지났다고?”
 
  평소라면 무시하거나 대충 거르는 그였지만 오늘만큼은 느물거리는 긴토키의 농에 지고 싶지 않았다. 이제 비꼬는 한 마디가 갔으니 화를 내는 두 마디가 와야 하는데 왜인지 긴토키는 이내 입을 다물어 버렸다. 쌓인 눈과 짙어진 밤의 공기, 정원의 앙상한 나무들의 그림자가 만들어낸 눈앞의 시린 정경 때문일 수도 있으리라. 둘 모두 무거운 어둠 속에 말을 아끼는 듯 했다. 두 번째 침묵을 깬 것은 다카스기였다. 

“하긴 했냐?”

 고개를 갸웃거리다 실없이 웃어버린다.

“왜? 안 서디? 너무 흥분돼서?”

  일부러 물음에 비웃음을 섞은 것은 그의 대답을 유도하기 위해서가 첫 번째, 긴장된 목소리를 숨기기 위해서가 두 번째였다.

“아냐. 새끼야.”

  엉망인 머리를 한 번 헤집고 자세를 고쳐 앉은 그가 그제 서야 운을 뗐다. 애가 울더라. 고 쪼꼬만 애가 술을 따르면서 우는 거야. 나도 긴장돼 죽겠는데. 그래서 왜, 너도 다카스기 시중들고 싶었는데 내가 걸려서 그래? 그랬더니 팔려왔대. 빚 때문에. 그러면서 우는 애를 어떻게 좋다고 안고 있냐. 민망한 듯 부러 목소리를 키우며 억울하다는 투로 대꾸하는 게 그다웠다. 병신, 여기 사연 없는 년이 어디 있어. 타박하고 싶었지만 다카스기는 이내 그만 두었다. 분명 안쓰러워 수중에 있던 돈도 다 쥐어줬을, 그저 사람 좋은 녀석이었다. 슬쩍 곁눈질 한 옆모습에서는 소년의 쑥스러움과 풋내가 담뿍 묻어났다.

“우린 뭘 위해 싸운 걸까.”

  내 이유는 분명했다. 나는 너와 선생님을 위해 싸웠다.

“이 전쟁이 최선일까.”

  네가 믿는 내 모습이 이거라면 전쟁이 최선이겠지.

“내가 지킨 건 뭘까.”

  회의와 무력감.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선봉에 있던 그들이 손에 쥘 수 있었던 것은 승리의 기쁨이나 전리품, 명예 따위가 아닌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사라지지 않는 허무함, 한껏 짊어져야 했던 기대와 같은 것들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이 밑바닥에서부터 네 사람을 서서히 좀먹고 있다는 것을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았다.

“춥다.”
“응. 춥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몸이 움츠러들었다. 이제는 두 사람 모두 기둥에 몸을 기대어 긴토키는 정면을, 다카스기는 긴토키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 내린 뒤 한껏 물기를 머금은 공기 때문인지 밤 달빛에 긴토키의 은발은 선명한 듯 점점 투명해졌다. 입고 있는 옷까지 하얀색이어서 그런지 온통 백색인 그 한가운데서 추위에 붉게 점찍어져 도드라진 귀가 외로워 보였다. 다카스기가 긴토키에게 손을 뻗은 건 순간이었다. 아주 조금, 앞으로는 잡을 수 없을 그것을 만져보고 싶었을 뿐이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긴토키의 표정을 읽기도 전에 다카스기의 몸이 먼저 움직였다. 몸집은 다카스기가 작았지만 긴토키를 내리누르는 힘은 입을 맞추고 끝내 혀를 내어주게 만들기 충분했다. 

  나는 어디서든 네 뒤만 쫓았다. 누구에게도 감히 말하지 못할 진심들이 두서없이 엉키고, 감히 전달할 수 없는 말들이 다카스기로 하여금 긴토키를 더욱 절박하게 몰아세우게 만들었다. 한 번 맞댔다 떨어진 입맞춤에 긴토키가 온몸으로 다카스기를 밀어내면, 두 번 얽힌 혀에 다카스기의 두 손이 긴토키의 얼굴을 재차 부여잡았다. 마룻바닥에 등을 밀려서인지 혀끝에서 간간히 울리는 신음과 추위 속의 입김조차 둘의 입 속으로 삭아 들어갔다.

  한참의 입맞춤 끝에 몸을 일으켜 마주 본 긴토키는 상기된 볼과 가쁜 숨을 제외하면 의외로 차분한 얼굴이었지만, 여전히 그의 생각을 읽기란 어려웠다. 이전부터 그랬다. 선생님이 그렇게 떠난 뒤, 긴토키의 과장된 몸짓과 우스꽝스러운 표정은 어떻게도 메울 수 없는 감정의 골을 숨기기 위한 그의 방책이었다는 것을 다카스기는 알고 있었다. 그가 긴토키를 쫓았다면 긴토키는 스승의 뒤만을 따라갔다. 어쩔 수 없는 굴레였다.

  긴토키는 아무렇지 않게 다카스기를 밀어냈다. 갑작스레 몸을 일으켜서인지 잠시 휘청거리던 그는 이내 말없이 흐트러진 허리춤을 다잡고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다카스기를 지나쳐 등 뒤 비어있을 방의 미닫이문을 열었다. 안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온기에 다카스기는 괜히 울고 싶어졌다. 무슨 말이든 기꺼이 감수하고 수긍하리라. 긴토키가 들어선 방으로 시선을 옮기며 각오했다.
 
  반듯하게 정돈된 이불위에서 긴토키는 망설임 없이 옷을 벗었다. 다카스기와는 등을 지고 있어 표정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겉옷을 재껴내고 허리끈을 푸는 몸짓에 군더더기가 없었다. 모든 불이 차단된 그곳은 눈이 내려 밝은 회색의 밤과 대조 되어 외따로 떨어진 공간 같았다. 가까이 서 있었지만 멀리 있는 듯, 문지방 너머는 옷깃이 스치는 소리와 낮은 숨만이 살아있었다. 

 “안 들어 올 거냐?”

  그곳에는 상흔으로 얼룩진 나체의 긴토키가 서 있었다.


  허락의 말은 무서웠다. 몇 번이고 입을 맞추며 가슴팍이든 허벅지든 손이 닿는 모든 곳을 매만지는 다카스기의 손길이 거침없었다. 그건 긴토키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카스기의 뒷머리부터 등허리까지 거칠게 쓸어내리는 손이 흥분에 겨워 이내 옆구리로 미끄러지기 일쑤였다. 전신에 끈적하게 돋아나는 땀과 배가 되어가는 열기에 막히는 숨을 주체하지 못하고 잠시 몸을 떼면, 금세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급하게 서로의 몸을 끌어당겼다.

  다카스기는 긴토키를 품 안에 가두려고 노력하는 듯, 자신의 가슴팍을 그의 등에 바짝 밀착해 그와 두 팔을 겹치고, 그 끝에 있는 손을 쥐었다. 이제야 스승을 따라 도망가던 그를 겨우 붙잡았다. 아랫도리를 파고드는 생소한 아픔에 긴토키가 다카스기를 피해 본능적으로 위로 기어 올라가면 그런 그를 계속해서 다시 끌어 내리는 행위가 반복되었다. 가지마. 도망 가지마. 다시 붙잡혀 이어지는 허릿짓에 긴토키가 괴로움에 몸을 틀며 긴 울음을 뽑아내자 이번에는 흥분한 다카스기가 바짝 붙였던 상체를 일으켜 긴토키의 등과 뒷머리를 바닥에 세차게 누른다. 붙잡았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도 내가 뒤따라간다. 터질 듯 뛰어대는 심장과 그 끝에서 간질거리며 치밀어 오르는 눈물에 괴롭다. 가지마. 나 두고 어디 가지마. 다카스기는 또 다시 울고 싶어졌다.

  맞닿은 이불 사이로 뭉개진 긴토키의 목소리가 비집고 나온다. 잘 들리지 않았다. 다카스기는 잠시 숨을 고르며 힘들었을 긴토기의 등을 연신 어루만져주고 이제는 한결 느긋하게 허리를 놀렸다. 좁게 열린 문틈사이로 들어오는 밤빛에 그의 등 위의 상처들이 미세하게 꿈틀거리고, 깊게 패인 굴곡 위에는 땀이 고였다. 고스란히 그의 이야기를 담고 있을 등. 그것을 이렇게 가까이서 보긴 처음이었다. 그때 다시 한 번 긴토키의 목소리가 들렸다. 잘 들리지 않아 다카스기는 허리를 숙여 조심스레 그의 얼굴 가까이에 자신의 귀를 갖다 댔다. 어디 안가. 그의 대답이었다.

  다카스기가 급하게 긴토키의 몸을 돌렸다. 땀에 절어 푹 가라앉은 앞머리를 훑어주니 그제 서야 반쯤 감고 있는 부은 눈이 보였다. 아파서인지 지나친 흥분상태가 힘겨웠는지 흘려보낸 눈물은 금세 다시 들어찼다. 눈, 눈 떠줘. 간절한 부탁이었다. 거의 검붉다고 표현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달아 오른 양 볼. 어쩌다 터졌는지 입가에는 옅은 핏자국이 점점이 박혀 있었다. 온몸을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괴로워하는 그를 보며 다카스기는 허겁지겁 입을 맞대고 다시 그를 찾아들었다.


  다정하게 얼굴을 마주보며 일어날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밤새 서로를 매만지고 옭아매다 끝내 탈력한 두 몸뚱이는 새벽까지 엉켜있다 밤의 색이 바뀌자 미련 없이 떨어졌다. 먼저 자리를 일어난 것은 긴토키였다. 처음 이 방에 들어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벗어 내린 옷을 집어 들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하나하나 걸쳐갔다. 사각거리는 소리가 잦아들자 방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을 느꼈지만 다카스기는 모르는 척 눈을 감고 있었다. 마주볼 자신이 없었다기보다 이렇게 끝내는 편이 옳다는 결론에서였다. 문이 열리고 평소와는 다른 엉성한 걸음걸이의 기척이 사라질 때까지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눈을 감고 있는 것이 전부였다.

  네 사람이 함께 유곽을 나온 건 아직 완전히 밝기 직전의 얕은 새벽녘이었다. 다들 재미 좋았냐? 왠지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사카모토가 말문을 열었다. 무사가 어떻게 여자를 살 수 있겠나. 난 단지 불쌍한 여자의 이야기를 밤새 들어줬을 뿐이다. 그 질문에 대꾸하는 것은 유난히 큰 헛기침을 해대는 가츠라 뿐이었다. 밤새 몸으로 직접 역사를 쓰신 거겠지. 두 사람은 투닥거리며 거리를 둔 채 걸어가던 다카스기와 긴토키를 앞질러 나갔다. 긴토키는 평소와 같은 표정과 몸짓을 하고 있었다. 다른 것이 있다면 다카스기 자신만이 알아볼 수 있는 터진 입술과 간간히 번져있는 목덜미의 흔적 정도였다. 니네는? 이제는 저만치 앞서가는 사카모토의 목소리였다. 나는,

“좋은 밤이었다.”

  별 일 없었다고 말하려는 찰나, 질문에 대한 대답인지 혼잣말인지 흘러가듯 대꾸하는 긴토키의 목소리가 들렸다. 놀라서 바라보니 그의 감은 눈과 다문 입매는 잠깐이나마 꽤나 부드럽게 휘어져 있었다. 뭐라고? 되물음에 이내 표정을 풀며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젓는다. 긴토키가 다카스기를 앞서 걸어 나갔다. 그래. 자신은 언제까지고 반걸음 앞에서 선생님을 쫓는 그의 뒷모습이면 충분했다. 좋은 밤. 그거면 족했다.

  무리에서 가장 늦게 성년의 대열에 합류한 건 사카모토였지만, 걔들 중 가장 먼저 전장을 떠난 것도 사카모토였으며, 이후 막부와 천인들 간의 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건 이제 막 소년의 얼굴을 벗은 스무 살의 세 사람이 여전히 전장 한 가운데 있을 때였다. 그리고 다카스기가 한 쪽 눈을 잃게 된 것은 좀 더 나중의 일이었다.

 

 

 

 

+ 자다가 새벽 네시에 갑자기 눈이 떠져 초고를 작성했었습니다. 저 치고는? 이렇게 빨리 쓴 게 처음인 것 같아요. 원래는 장편으로 연성할 떡밥이었는데 보고 싶은 부분만 쓱쓱 써내려 갔습니다. 혹시 나중에 먼 훗날 장편의 일부가 될지도?

+ 제 안의 긴토키는 그게 다카스기건 히지카타건 쇼요만 바라보는 것 같습니다. 물론 어떤 계기로 그 마음이 바뀔 수 있겠지만 적어도 사랑보다는 연민, 의무, 동정류였으면 좋겠어요.  새드가 좋아요...흑흑 둘 중 꼭 누가 죽었음 좋겠고 막 그래요.

+19금도 하나도 안야한데 그래도 고츄를 고츄라 부르지 못하는 세상이니...미자 분들이 많아 편집해서 올립니다..중간에 씬이 잘려나가니 그 느낌이 안나...흑

+ 아무튼 여러분 긴수/긴른은 진리입니다. 같이 파주세요. 엉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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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Ha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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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카긴] 소년의 밤

2015. 9. 5.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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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색의 증거 上 (현실AU)



  오늘도 역시 히지카타는 긴토키에게서 새로운 것을 발견했다. 이제 와서 자신이 몰랐던 그의 일부를 발견하는 것은 사실 놀랄 일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흥분되는 일이었고, 어느 때는 억울하기도 했으며, 여러 번의 추궁과 실망 끝에 이제는 태연해 질 수 있었지만, 이번에는 좀 달랐다. 약간의 과장을 더하자면 그가 알고 있던 사카타 긴토키를 재정의해야 할 만큼의 중대한 사건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머리칼은 타고난 은발이었다. 확실한 것은 아니었지만 인위적으로 만든 색이라기엔 뿌리 끝부터 시작하는 백색이 너무나 뚜렷했으며, 탈색 모발 특유의 탁함이나 누런 끼도 일체 보이지 않았다. 그렇기에 바람에 뿌옇게 일어나는 흙먼지와 자연스럽게 섞이는 그 색을 보며, 내가 만지면 부서질 수도 있어, 히지카타는 과 동기로서 그를 처음 대면했을 때부터 그렇게 정해 두었다. 감히 그의 은발에는 손을 댈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물론 그가 의식하며 행동하지 않아도 긴토키 또한 자신의 은발에 손을 대지 말 것을 요구했다. 그건 부탁이라기 보단 일방적인 거부나 과민 반응에 가까웠다. 어깨 위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떼어내거나, 등 뒤에서 차분히 감싸 안을 때, 유난히 빨개진 귀를 살짝 건들이며 별 의미 없이 은발에 손이 스치기라도 하면, 평소엔 늦된 그라도 무섭게 화를 내며 히지카타를 밀치곤 했다. 서운했지만, 긴토키의 거부가 습관적으로 반복되면서 그것 또한 이내 수긍해 버렸다. 더 신경 쓰기 귀찮다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였지만 주변에선 히지카타가 그에게 반쯤은 매달리고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색이 예뻐. 어떻게 사람 머리색이 은색일 수 있지?”

  만나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한 번은 히지카타가 슬쩍 운을 뗀 적이 있다. 그 때는 이미 긴토키의 발작적 반응을 알고 있던 터라, 대화는 되도록 조심스럽고 대수롭지 않은 투로, 별로 중요하지 않은 문제인 것처럼 시작해야 했다. 독촉하지도 말아야 했다. 자신이 관심 없는 일엔 상대방이 질문을 한 것을 잊을 때 쯤 반응해주는 그였기 때문이다. 여느 때처럼 소파 위에 누워 눈을 감고 있던 그는 히지카타가 부엌 한 번, 화장실 한 번을 다녀와 소파 앞에 앉을 때가 돼서야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글쎄. 그러게. 왜일까.”

  의뭉스러운 반응이었다. 예상은 했지만 만족스럽지 않았다. 너무하네. 그를 타박하며 히지카타는 긴토키 몰래 그의 은발에 손을 뻗었다. 물론 닿을 순 없다. 그저 멀리서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돈하듯 움직이는 것이 그가 은밀하게 즐길 수 있는 스킨십의 전부였다. 곱슬의 물결을 따라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이며 이번엔 좀 더 직접적으로 던져보았다.

“원래부터 은발이었어?”

  히지카타의 손목이 갑작스레 잡힌 건 그 때였다. 하마터면 부끄러울 정도로 놀란 티를 낼 뻔 했다. 다행이 긴토키는 그 정도 장난에는 관대하다는 듯 이내 손을 놓아주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뒤로 물러난 그의 가슴팍을 두어 번 두들겼다.

“염색은 아니야. 그런 거 해본 적 없어.”

  그 말을 멋대로 해석해 그 때부터 사카타 긴토키의 은발은 타고난 거라고 단정 지었던 것 같다. 생각해보면 ‘타고난 은발’이라는 것 자체가 동양인에게는 거의 불가능한 일인데도 불구하고 쉽게 납득했던 건, 눈동자나 피부색은 둘째 치고, 선을 긋는 듯한 그의 단호한 대답과 내젓는 손짓이 주 이유였을 것이다. 무튼 이유야 어찌됐든 히지카타는 이전의 발견과 질문, 돌아오는 대답에 수긍했던 수순을 따라 그의 은발에 대해서도 그렇게 결론 내리고 지금까지 함구해 왔었다.

  그래서 오늘 아침, 머리를 감겨 달라는 긴토키의 말이 히지카타는 매우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행동이 느린 그를 위해 긴토키의 아침 일과를 챙기는 것은 그가 기꺼이 자처한 일이기에 사소한 부탁과 요구는 일상이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자신의 은발을 만질 수 있게 한다는 것, 그것도 끈질긴 요청에 의해서가 아닌 자발적인 제안에 가깝다는 것이 유치하게도 히지카타를 벅차게 했다.

“왜, 싫어?”

  당황스러움이 기쁨이 될 때쯤, 이번에는 자신의 반응이 늦다는 것을 깨달았다. 행복하거나 기쁠 때도 유난스럽게 표현하지 말 것. 큰 기복이 없는 긴토키를 따라 히지카타 또한 자연스럽게 익힌 감정 표현 방식이었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긍정을 표현하고, 아무렇지 않게 티셔츠 소매를 걷고, 조금은 귀찮다는 듯이 욕실에 따라 들어가야 했다.

  예상대로 부드러웠다. 생각보다는 가늘었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풍성한 은발이 한 움큼씩 잡힐 때마다 단이 낮은 욕실 의자에 앉아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리는 긴토키의 뒷모습까지 완벽했다. 몇 번이고 조심스럽게 은발을 매만지며, 히지카타는 그제 서야 지난 일 년 간 자신이 가졌던 의심과 조바심이 기우였음을 확신했다.

  히지카타가 분노하면 되려 웃던 그였다. 히지카타가 뒤를 쫓으면 결코 기다리지 않던 그였다. 쟤 좀 이상해. 과 동기들 사이에서 우울증이라느니 약을 한다느니, 온갖 소문이 돌고 또 그게 사실이라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항상 옆에 있어도 도무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지극히 인간적인 반응마저 아끼던 그였다. 이제야, 몇 번이고 마주 앉아 밥을 먹고, 입을 맞추고, 몸을 섞었어도 느낄 수 없었던 감격이 이 작은 행위에서 비롯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며 긴토키의 뒷머리를 쓸어 올릴 때쯤 히지카타가 발견한 건 드문드문 비져 나와 선명하게 자리 잡은 검은색 머리칼이었다.









+ 원래는 흑발인 긴토키의 머리가 어떠한 이유로 하얗게 새어버렸다는 떡밥은 쓰고 싶은데 동시에 백야차라는 별명이 너무 좋아 이를 망치지 않기 위해 결국 선택하게 된 것 = 현실AU입니다.
+ 상/하로 구성되어 있고, 글 맥락상 여기서 끊었으나 하편은 조금 길어질 수도 있을 것 같네요.
+ 제 존잘님 로렌님(@laureney_)께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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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Ha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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