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의 밤


  동기들 중 가장 늦게 열아홉 살을 넘긴 건 사카모토였다. 고작 몇 달 차이로 위아래를 나누는 것도 웃겼지만, 엄밀하게 따진다면 무리들 중 가장 애송이 녀석이었다. 그런데도 대담하게 유곽에 갈 것을 제안한 건 뒤늦게 나이를 따라잡은 사카모토였고, 관심을 보이며 바람잡이 역할을 한건 긴토키, 바짝 긴장하며 얼굴을 붉힌 건 가츠라였다. 돈 걱정은 말라느니, 이 상황에서 돈이 문제가 아니라느니, 지금이야말로 적절한 ‘동기부여’가 필요한 시점이라느니, 전장에서의 활약이 무색할 정도로 여전히 ‘계집’이라는 단어에 호기심과 쑥스러움을 내보이는 그들은 아직은 퍼런 소년들이었다. 
 
  막부와 천인들 간 뒷거래가 있다는 소문이 나돌며 전쟁이 소규모 국지전 양상으로 바뀌면서 소강상태로 접어든 건 꽤 오래된 이야기였다. 그래도 엄연한 전시상황이었지만 느슨해 진 틈을 타 가장 먼저 활기를 띄기 시작한건 술장사와 물장사였다. 귀병대 나으리, 귀공자 나으리. 여기저기서 소위 ‘전쟁영웅’이었던 그들을 나긋나긋한 목소리와 살랑거리는 손짓들이 붙잡았다. 막부에 대한 불신과 천인에 대한 분노가 컸던 장사치들은 더럿 그들에게 돈 걱정 없이 놀고 가라며 끌어당기기 바빴다.

  의외로 붙잡는 목소리들 사이에서 ‘백야차’가 없었던 것은 그네들 중 진짜배기 ‘전쟁영웅’이 바로 사카타 긴토키였기 때문이다. 수려한 외모의 가츠라나 독립된 부대를 이끌었던 다카스기, 화술과 지략에 능했던 사카모토와는 달리 자기 몸 하나가 전부였던 그였다. 실은 그가 막부의 핏줄이라느니, 기집이라느니, 전쟁의 두려움이 만들어낸 허상의 인물이라느니, 백야차에 대한 무성한 소문들은 되려 그네들에게 괴물의 존재를 유명무실하게 만들어버렸다. 한 번씩 그것에 대해 동료들에게 불만을 터트리던 그였지만 그것이 진심이 아니라는 것 또한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가 선택한 유녀가 새초롬히 자신을 선택하는 것에 변명과 억울함을 늘어놓는 긴토키를 보며, 다카스기는 그렇게 생각했다. 

  기집에게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굳이 돈을 지불하고 여자를 살 정도로 궁한 것도 아니었다. 이끄는 부대에게도 적당한 유희와 사기가 필요하다며 자신을 설득한 사카모토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언제까지 분노를 원동력 삼아 전투를 이어갈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분노, 원망, 두려움과 나라를 위한 다는 대의명분 같은 것들. 애초에 다카스기가 전쟁에 참여한 것은 그런 것을 좇아서가 아니었다. 언제든 할복할 준비가 되어있던 가츠라와는 달리 그에게 전쟁터는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할 이유밖에 없는 곳이었다. 다카스기에게 지지부진한 힘겨루기를 해야 하는 동기는 선생님과 전장 한 가운데 서 있는 긴토키. 그거면 충분했다.

  자신을 선택한 유녀에게 미안한 마음에서라도 억지로 세워보려 노력했지만 전혀 동하지 않았다. 방싯방싯 웃는 얼굴과 두꺼운 화장에도 숨길 수 없는, 이제 막 벗기 시작한 땟자국과 가난, 여전히 남아있는 절박함, 앳된 얼굴이지만 자신보다 족히 열 살은 많아 보였던 비쩍 마른 손이 다카스기에게 새삼 그가 있어야 할 위치와 허무함을 느끼게 했다. 아직 스물도 되지 않았던 청춘들이 지고 있던 나이의 무게는 하룻밤 유희에도 쉽게 져 버릴 수 없는 그런 것이었다.

  표면적인 이유가 그것이었다면 진심에 가까웠던 것은 긴토키였다. 다카스기에게 듬성듬성 붉은 핏자국과 전투의 먼지가 가라앉은 그 애의 지저분한 은발보다, 촌스러운 농담보다, 웃음과 몸짓보다 그를 동요하게 하는 것은 없었다. 처음에는 쇼요의 제자들이 모두 그렇듯 스승의 뒷모습을 따라갔다. 이후 쇼요의 가장 가까운 곳에 서 있던 긴토키를 바라보기 시작한 건 철이든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이유야 어찌됐든 다카스기는 결국 유녀에게 비밀로 할 것을 부탁하고 돈을 쥐어 내보내야 했다.

  11월의 겨울이 춥지 않은 에도의 밤이었다. 다들 열심히 임무 수행 중이려나. 막 눈이 쌓이기 시작한 툇마루에 앉은 다카스기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어떻게 여자를 안을지, 어떤 말로 시작할지 등의 별 소득 없는 망상뿐이었다. 긴토키는 자신의 유녀를 그에게 빼앗겼다고 분노했지만 실상 패배감을 느껴야 했던 것은 다카스기 본인이었다. 갑작스레 인기척을 느낀 건 한참을 내리던 눈이 그친 후였다. 감은 눈에도 본능적으로 허리춤의 칼집부터 더듬었다. 익숙한 발걸음이 아니었다면 이내 뽑아들었을 것이다. 아무리 덜 깊어진 계절이었지만 긴토키는 백의의 앞섶을 반쯤 헤치고 얇은 겉옷만을 걸친 채였다. 그 모습에 반가움보다 앞선 것은 초조함이었다.

“나도 한 모금만.”
“너 담배 태웠냐?”
“아니, 성인식 기념이야.”

  다카스기의 옆에 자리를 잡은 긴토키는 대뜸 그의 입에 물려 있던 담뱃대를 뺏어 들었다. 그리고 미간을 한껏 찌푸리며 몇 모금 빨아들이더니 이내 기침을 해대매 손을 휘휘 젓는다. 이게 왜 좋은지 난 모르겠다. 그의 혼잣말에 다카스기는 별 대꾸 없이 다시 담뱃대를 건네받았다.

“너 세우지도 못한 거 아냐? 왜 이렇게 빨리 나와 있어.”
“넌 조루냐? 몇 분이나 지났다고?”
 
  평소라면 무시하거나 대충 거르는 그였지만 오늘만큼은 느물거리는 긴토키의 농에 지고 싶지 않았다. 이제 비꼬는 한 마디가 갔으니 화를 내는 두 마디가 와야 하는데 왜인지 긴토키는 이내 입을 다물어 버렸다. 쌓인 눈과 짙어진 밤의 공기, 정원의 앙상한 나무들의 그림자가 만들어낸 눈앞의 시린 정경 때문일 수도 있으리라. 둘 모두 무거운 어둠 속에 말을 아끼는 듯 했다. 두 번째 침묵을 깬 것은 다카스기였다. 

“하긴 했냐?”

 고개를 갸웃거리다 실없이 웃어버린다.

“왜? 안 서디? 너무 흥분돼서?”

  일부러 물음에 비웃음을 섞은 것은 그의 대답을 유도하기 위해서가 첫 번째, 긴장된 목소리를 숨기기 위해서가 두 번째였다.

“아냐. 새끼야.”

  엉망인 머리를 한 번 헤집고 자세를 고쳐 앉은 그가 그제 서야 운을 뗐다. 애가 울더라. 고 쪼꼬만 애가 술을 따르면서 우는 거야. 나도 긴장돼 죽겠는데. 그래서 왜, 너도 다카스기 시중들고 싶었는데 내가 걸려서 그래? 그랬더니 팔려왔대. 빚 때문에. 그러면서 우는 애를 어떻게 좋다고 안고 있냐. 민망한 듯 부러 목소리를 키우며 억울하다는 투로 대꾸하는 게 그다웠다. 병신, 여기 사연 없는 년이 어디 있어. 타박하고 싶었지만 다카스기는 이내 그만 두었다. 분명 안쓰러워 수중에 있던 돈도 다 쥐어줬을, 그저 사람 좋은 녀석이었다. 슬쩍 곁눈질 한 옆모습에서는 소년의 쑥스러움과 풋내가 담뿍 묻어났다.

“우린 뭘 위해 싸운 걸까.”

  내 이유는 분명했다. 나는 너와 선생님을 위해 싸웠다.

“이 전쟁이 최선일까.”

  네가 믿는 내 모습이 이거라면 전쟁이 최선이겠지.

“내가 지킨 건 뭘까.”

  회의와 무력감.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선봉에 있던 그들이 손에 쥘 수 있었던 것은 승리의 기쁨이나 전리품, 명예 따위가 아닌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사라지지 않는 허무함, 한껏 짊어져야 했던 기대와 같은 것들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이 밑바닥에서부터 네 사람을 서서히 좀먹고 있다는 것을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았다.

“춥다.”
“응. 춥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몸이 움츠러들었다. 이제는 두 사람 모두 기둥에 몸을 기대어 긴토키는 정면을, 다카스기는 긴토키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 내린 뒤 한껏 물기를 머금은 공기 때문인지 밤 달빛에 긴토키의 은발은 선명한 듯 점점 투명해졌다. 입고 있는 옷까지 하얀색이어서 그런지 온통 백색인 그 한가운데서 추위에 붉게 점찍어져 도드라진 귀가 외로워 보였다. 다카스기가 긴토키에게 손을 뻗은 건 순간이었다. 아주 조금, 앞으로는 잡을 수 없을 그것을 만져보고 싶었을 뿐이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긴토키의 표정을 읽기도 전에 다카스기의 몸이 먼저 움직였다. 몸집은 다카스기가 작았지만 긴토키를 내리누르는 힘은 입을 맞추고 끝내 혀를 내어주게 만들기 충분했다. 

  나는 어디서든 네 뒤만 쫓았다. 누구에게도 감히 말하지 못할 진심들이 두서없이 엉키고, 감히 전달할 수 없는 말들이 다카스기로 하여금 긴토키를 더욱 절박하게 몰아세우게 만들었다. 한 번 맞댔다 떨어진 입맞춤에 긴토키가 온몸으로 다카스기를 밀어내면, 두 번 얽힌 혀에 다카스기의 두 손이 긴토키의 얼굴을 재차 부여잡았다. 마룻바닥에 등을 밀려서인지 혀끝에서 간간히 울리는 신음과 추위 속의 입김조차 둘의 입 속으로 삭아 들어갔다.

  한참의 입맞춤 끝에 몸을 일으켜 마주 본 긴토키는 상기된 볼과 가쁜 숨을 제외하면 의외로 차분한 얼굴이었지만, 여전히 그의 생각을 읽기란 어려웠다. 이전부터 그랬다. 선생님이 그렇게 떠난 뒤, 긴토키의 과장된 몸짓과 우스꽝스러운 표정은 어떻게도 메울 수 없는 감정의 골을 숨기기 위한 그의 방책이었다는 것을 다카스기는 알고 있었다. 그가 긴토키를 쫓았다면 긴토키는 스승의 뒤만을 따라갔다. 어쩔 수 없는 굴레였다.

  긴토키는 아무렇지 않게 다카스기를 밀어냈다. 갑작스레 몸을 일으켜서인지 잠시 휘청거리던 그는 이내 말없이 흐트러진 허리춤을 다잡고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다카스기를 지나쳐 등 뒤 비어있을 방의 미닫이문을 열었다. 안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온기에 다카스기는 괜히 울고 싶어졌다. 무슨 말이든 기꺼이 감수하고 수긍하리라. 긴토키가 들어선 방으로 시선을 옮기며 각오했다.
 
  반듯하게 정돈된 이불위에서 긴토키는 망설임 없이 옷을 벗었다. 다카스기와는 등을 지고 있어 표정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겉옷을 재껴내고 허리끈을 푸는 몸짓에 군더더기가 없었다. 모든 불이 차단된 그곳은 눈이 내려 밝은 회색의 밤과 대조 되어 외따로 떨어진 공간 같았다. 가까이 서 있었지만 멀리 있는 듯, 문지방 너머는 옷깃이 스치는 소리와 낮은 숨만이 살아있었다. 

 “안 들어 올 거냐?”

  그곳에는 상흔으로 얼룩진 나체의 긴토키가 서 있었다.


  허락의 말은 무서웠다. 몇 번이고 입을 맞추며 가슴팍이든 허벅지든 손이 닿는 모든 곳을 매만지는 다카스기의 손길이 거침없었다. 그건 긴토키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카스기의 뒷머리부터 등허리까지 거칠게 쓸어내리는 손이 흥분에 겨워 이내 옆구리로 미끄러지기 일쑤였다. 전신에 끈적하게 돋아나는 땀과 배가 되어가는 열기에 막히는 숨을 주체하지 못하고 잠시 몸을 떼면, 금세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급하게 서로의 몸을 끌어당겼다.

  다카스기는 긴토키를 품 안에 가두려고 노력하는 듯, 자신의 가슴팍을 그의 등에 바짝 밀착해 그와 두 팔을 겹치고, 그 끝에 있는 손을 쥐었다. 이제야 스승을 따라 도망가던 그를 겨우 붙잡았다. 아랫도리를 파고드는 생소한 아픔에 긴토키가 다카스기를 피해 본능적으로 위로 기어 올라가면 그런 그를 계속해서 다시 끌어 내리는 행위가 반복되었다. 가지마. 도망 가지마. 다시 붙잡혀 이어지는 허릿짓에 긴토키가 괴로움에 몸을 틀며 긴 울음을 뽑아내자 이번에는 흥분한 다카스기가 바짝 붙였던 상체를 일으켜 긴토키의 등과 뒷머리를 바닥에 세차게 누른다. 붙잡았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도 내가 뒤따라간다. 터질 듯 뛰어대는 심장과 그 끝에서 간질거리며 치밀어 오르는 눈물에 괴롭다. 가지마. 나 두고 어디 가지마. 다카스기는 또 다시 울고 싶어졌다.

  맞닿은 이불 사이로 뭉개진 긴토키의 목소리가 비집고 나온다. 잘 들리지 않았다. 다카스기는 잠시 숨을 고르며 힘들었을 긴토기의 등을 연신 어루만져주고 이제는 한결 느긋하게 허리를 놀렸다. 좁게 열린 문틈사이로 들어오는 밤빛에 그의 등 위의 상처들이 미세하게 꿈틀거리고, 깊게 패인 굴곡 위에는 땀이 고였다. 고스란히 그의 이야기를 담고 있을 등. 그것을 이렇게 가까이서 보긴 처음이었다. 그때 다시 한 번 긴토키의 목소리가 들렸다. 잘 들리지 않아 다카스기는 허리를 숙여 조심스레 그의 얼굴 가까이에 자신의 귀를 갖다 댔다. 어디 안가. 그의 대답이었다.

  다카스기가 급하게 긴토키의 몸을 돌렸다. 땀에 절어 푹 가라앉은 앞머리를 훑어주니 그제 서야 반쯤 감고 있는 부은 눈이 보였다. 아파서인지 지나친 흥분상태가 힘겨웠는지 흘려보낸 눈물은 금세 다시 들어찼다. 눈, 눈 떠줘. 간절한 부탁이었다. 거의 검붉다고 표현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달아 오른 양 볼. 어쩌다 터졌는지 입가에는 옅은 핏자국이 점점이 박혀 있었다. 온몸을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괴로워하는 그를 보며 다카스기는 허겁지겁 입을 맞대고 다시 그를 찾아들었다.


  다정하게 얼굴을 마주보며 일어날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밤새 서로를 매만지고 옭아매다 끝내 탈력한 두 몸뚱이는 새벽까지 엉켜있다 밤의 색이 바뀌자 미련 없이 떨어졌다. 먼저 자리를 일어난 것은 긴토키였다. 처음 이 방에 들어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벗어 내린 옷을 집어 들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하나하나 걸쳐갔다. 사각거리는 소리가 잦아들자 방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을 느꼈지만 다카스기는 모르는 척 눈을 감고 있었다. 마주볼 자신이 없었다기보다 이렇게 끝내는 편이 옳다는 결론에서였다. 문이 열리고 평소와는 다른 엉성한 걸음걸이의 기척이 사라질 때까지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눈을 감고 있는 것이 전부였다.

  네 사람이 함께 유곽을 나온 건 아직 완전히 밝기 직전의 얕은 새벽녘이었다. 다들 재미 좋았냐? 왠지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사카모토가 말문을 열었다. 무사가 어떻게 여자를 살 수 있겠나. 난 단지 불쌍한 여자의 이야기를 밤새 들어줬을 뿐이다. 그 질문에 대꾸하는 것은 유난히 큰 헛기침을 해대는 가츠라 뿐이었다. 밤새 몸으로 직접 역사를 쓰신 거겠지. 두 사람은 투닥거리며 거리를 둔 채 걸어가던 다카스기와 긴토키를 앞질러 나갔다. 긴토키는 평소와 같은 표정과 몸짓을 하고 있었다. 다른 것이 있다면 다카스기 자신만이 알아볼 수 있는 터진 입술과 간간히 번져있는 목덜미의 흔적 정도였다. 니네는? 이제는 저만치 앞서가는 사카모토의 목소리였다. 나는,

“좋은 밤이었다.”

  별 일 없었다고 말하려는 찰나, 질문에 대한 대답인지 혼잣말인지 흘러가듯 대꾸하는 긴토키의 목소리가 들렸다. 놀라서 바라보니 그의 감은 눈과 다문 입매는 잠깐이나마 꽤나 부드럽게 휘어져 있었다. 뭐라고? 되물음에 이내 표정을 풀며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젓는다. 긴토키가 다카스기를 앞서 걸어 나갔다. 그래. 자신은 언제까지고 반걸음 앞에서 선생님을 쫓는 그의 뒷모습이면 충분했다. 좋은 밤. 그거면 족했다.

  무리에서 가장 늦게 성년의 대열에 합류한 건 사카모토였지만, 걔들 중 가장 먼저 전장을 떠난 것도 사카모토였으며, 이후 막부와 천인들 간의 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건 이제 막 소년의 얼굴을 벗은 스무 살의 세 사람이 여전히 전장 한 가운데 있을 때였다. 그리고 다카스기가 한 쪽 눈을 잃게 된 것은 좀 더 나중의 일이었다.

 

 

 

 

+ 자다가 새벽 네시에 갑자기 눈이 떠져 초고를 작성했었습니다. 저 치고는? 이렇게 빨리 쓴 게 처음인 것 같아요. 원래는 장편으로 연성할 떡밥이었는데 보고 싶은 부분만 쓱쓱 써내려 갔습니다. 혹시 나중에 먼 훗날 장편의 일부가 될지도?

+ 제 안의 긴토키는 그게 다카스기건 히지카타건 쇼요만 바라보는 것 같습니다. 물론 어떤 계기로 그 마음이 바뀔 수 있겠지만 적어도 사랑보다는 연민, 의무, 동정류였으면 좋겠어요.  새드가 좋아요...흑흑 둘 중 꼭 누가 죽었음 좋겠고 막 그래요.

+19금도 하나도 안야한데 그래도 고츄를 고츄라 부르지 못하는 세상이니...미자 분들이 많아 편집해서 올립니다..중간에 씬이 잘려나가니 그 느낌이 안나...흑

+ 아무튼 여러분 긴수/긴른은 진리입니다. 같이 파주세요. 엉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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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Ha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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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카긴] 소년의 밤

2015. 9. 5.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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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색의 증거 上 (현실AU)



  오늘도 역시 히지카타는 긴토키에게서 새로운 것을 발견했다. 이제 와서 자신이 몰랐던 그의 일부를 발견하는 것은 사실 놀랄 일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흥분되는 일이었고, 어느 때는 억울하기도 했으며, 여러 번의 추궁과 실망 끝에 이제는 태연해 질 수 있었지만, 이번에는 좀 달랐다. 약간의 과장을 더하자면 그가 알고 있던 사카타 긴토키를 재정의해야 할 만큼의 중대한 사건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머리칼은 타고난 은발이었다. 확실한 것은 아니었지만 인위적으로 만든 색이라기엔 뿌리 끝부터 시작하는 백색이 너무나 뚜렷했으며, 탈색 모발 특유의 탁함이나 누런 끼도 일체 보이지 않았다. 그렇기에 바람에 뿌옇게 일어나는 흙먼지와 자연스럽게 섞이는 그 색을 보며, 내가 만지면 부서질 수도 있어, 히지카타는 과 동기로서 그를 처음 대면했을 때부터 그렇게 정해 두었다. 감히 그의 은발에는 손을 댈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물론 그가 의식하며 행동하지 않아도 긴토키 또한 자신의 은발에 손을 대지 말 것을 요구했다. 그건 부탁이라기 보단 일방적인 거부나 과민 반응에 가까웠다. 어깨 위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떼어내거나, 등 뒤에서 차분히 감싸 안을 때, 유난히 빨개진 귀를 살짝 건들이며 별 의미 없이 은발에 손이 스치기라도 하면, 평소엔 늦된 그라도 무섭게 화를 내며 히지카타를 밀치곤 했다. 서운했지만, 긴토키의 거부가 습관적으로 반복되면서 그것 또한 이내 수긍해 버렸다. 더 신경 쓰기 귀찮다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였지만 주변에선 히지카타가 그에게 반쯤은 매달리고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색이 예뻐. 어떻게 사람 머리색이 은색일 수 있지?”

  만나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한 번은 히지카타가 슬쩍 운을 뗀 적이 있다. 그 때는 이미 긴토키의 발작적 반응을 알고 있던 터라, 대화는 되도록 조심스럽고 대수롭지 않은 투로, 별로 중요하지 않은 문제인 것처럼 시작해야 했다. 독촉하지도 말아야 했다. 자신이 관심 없는 일엔 상대방이 질문을 한 것을 잊을 때 쯤 반응해주는 그였기 때문이다. 여느 때처럼 소파 위에 누워 눈을 감고 있던 그는 히지카타가 부엌 한 번, 화장실 한 번을 다녀와 소파 앞에 앉을 때가 돼서야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글쎄. 그러게. 왜일까.”

  의뭉스러운 반응이었다. 예상은 했지만 만족스럽지 않았다. 너무하네. 그를 타박하며 히지카타는 긴토키 몰래 그의 은발에 손을 뻗었다. 물론 닿을 순 없다. 그저 멀리서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돈하듯 움직이는 것이 그가 은밀하게 즐길 수 있는 스킨십의 전부였다. 곱슬의 물결을 따라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이며 이번엔 좀 더 직접적으로 던져보았다.

“원래부터 은발이었어?”

  히지카타의 손목이 갑작스레 잡힌 건 그 때였다. 하마터면 부끄러울 정도로 놀란 티를 낼 뻔 했다. 다행이 긴토키는 그 정도 장난에는 관대하다는 듯 이내 손을 놓아주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뒤로 물러난 그의 가슴팍을 두어 번 두들겼다.

“염색은 아니야. 그런 거 해본 적 없어.”

  그 말을 멋대로 해석해 그 때부터 사카타 긴토키의 은발은 타고난 거라고 단정 지었던 것 같다. 생각해보면 ‘타고난 은발’이라는 것 자체가 동양인에게는 거의 불가능한 일인데도 불구하고 쉽게 납득했던 건, 눈동자나 피부색은 둘째 치고, 선을 긋는 듯한 그의 단호한 대답과 내젓는 손짓이 주 이유였을 것이다. 무튼 이유야 어찌됐든 히지카타는 이전의 발견과 질문, 돌아오는 대답에 수긍했던 수순을 따라 그의 은발에 대해서도 그렇게 결론 내리고 지금까지 함구해 왔었다.

  그래서 오늘 아침, 머리를 감겨 달라는 긴토키의 말이 히지카타는 매우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행동이 느린 그를 위해 긴토키의 아침 일과를 챙기는 것은 그가 기꺼이 자처한 일이기에 사소한 부탁과 요구는 일상이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자신의 은발을 만질 수 있게 한다는 것, 그것도 끈질긴 요청에 의해서가 아닌 자발적인 제안에 가깝다는 것이 유치하게도 히지카타를 벅차게 했다.

“왜, 싫어?”

  당황스러움이 기쁨이 될 때쯤, 이번에는 자신의 반응이 늦다는 것을 깨달았다. 행복하거나 기쁠 때도 유난스럽게 표현하지 말 것. 큰 기복이 없는 긴토키를 따라 히지카타 또한 자연스럽게 익힌 감정 표현 방식이었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긍정을 표현하고, 아무렇지 않게 티셔츠 소매를 걷고, 조금은 귀찮다는 듯이 욕실에 따라 들어가야 했다.

  예상대로 부드러웠다. 생각보다는 가늘었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풍성한 은발이 한 움큼씩 잡힐 때마다 단이 낮은 욕실 의자에 앉아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리는 긴토키의 뒷모습까지 완벽했다. 몇 번이고 조심스럽게 은발을 매만지며, 히지카타는 그제 서야 지난 일 년 간 자신이 가졌던 의심과 조바심이 기우였음을 확신했다.

  히지카타가 분노하면 되려 웃던 그였다. 히지카타가 뒤를 쫓으면 결코 기다리지 않던 그였다. 쟤 좀 이상해. 과 동기들 사이에서 우울증이라느니 약을 한다느니, 온갖 소문이 돌고 또 그게 사실이라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항상 옆에 있어도 도무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지극히 인간적인 반응마저 아끼던 그였다. 이제야, 몇 번이고 마주 앉아 밥을 먹고, 입을 맞추고, 몸을 섞었어도 느낄 수 없었던 감격이 이 작은 행위에서 비롯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며 긴토키의 뒷머리를 쓸어 올릴 때쯤 히지카타가 발견한 건 드문드문 비져 나와 선명하게 자리 잡은 검은색 머리칼이었다.









+ 원래는 흑발인 긴토키의 머리가 어떠한 이유로 하얗게 새어버렸다는 떡밥은 쓰고 싶은데 동시에 백야차라는 별명이 너무 좋아 이를 망치지 않기 위해 결국 선택하게 된 것 = 현실AU입니다.
+ 상/하로 구성되어 있고, 글 맥락상 여기서 끊었으나 하편은 조금 길어질 수도 있을 것 같네요.
+ 제 존잘님 로렌님(@laureney_)께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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